2010년/10월
제주시 조천읍 함덕리
수채화처럼 아름다운 청정마을
가을 하늘만큼이나 깨끗하게 파란 해수욕장.
눈으로만 바라봐도 그건 그대로 작품이 된다.
바라보는 눈까지 다 깨끗해지는 느낌을 주는 ‘정갈한’ 파란색과
에메랄드빛이 어우러져 연신 감탄을 내뿜게 하는 제주시 조천읍 함덕리 함덕해수욕장.
해수욕을 즐기는 사람들로 붐비는 여름을 피해 찾아가면 아름다움의 진가가 더 빛나는 곳이다.
그래서 4계절 내내 제주도민은 물론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곳이 함덕리다.
제주시내에서 동쪽으로 약 14㎞떨어진 곳에 위치한 함덕리는 2200여 세대, 6300여명이 살고 있으며, 함덕해수욕장을 매개로 관광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점점 커지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 해수욕장 주변, 함덕관광지구에는 대규모 리조트와 놀이기구 시설을 비롯해 편의점, 각종 음식점 등 상가가 지속적으로 들어서면서 마을의 모습을 바꿔놓고 있다.
마을의 발전을 이끌고 활기를 불어넣는 해수욕장이 이곳 함덕리의 보물이나 다름없다.
풍수지리에 권위 있는 학자의 자문에 의하면, 함덕리 서우봉은 마을에 병풍을 두른 것 같으면서 살찐 물소가 뭍으로 기어 올라오는 형상을 하고 있어서 가히 덕산으로 일컫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한다.
# 덕 있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
이러한 명당의 지형적 조건이 함덕리 취락형성의 기초가 되었다. 또한 ‘함덕(咸德)’을 지리학적 의미로 한자를 해석해 ‘덕 있는 사람들만이 모여 사는 마을’ 이라는 뜻에서 함덕이란 마을이름이 작명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함덕(咸德)이라는 현촌 이름이 기재된 것은 12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함덕리는 고려 원종 14년(1273년) 삼별초군이 여몽연합군과의 전투에서 참패하여 피가 흘러 내를 이루었다는 민족항쟁의 처절한 격전장이었고, 고려 충렬왕 26년(1300년) 도내 14곳 현촌 중 하나였다.
함덕리는 삼별초의 방어진지가 되면서 군사진지와 해상교통의 요지로 떠오른다. 이후 농업노동인구 증가와 더불어 공마진상의 부역, 해상활동을 위한 상업인구가 늘면서 대촌마을의 기반이 이뤄진 것으로 보고 있다.
1702년(숙종28년) 이형상 목사 등에 의해 그려진 탐라순력도에 함덕포가 있고, 1800년대의 지도에는 함덕포의 이름이 강임포로 표시되어 있다. 강임포는 '강영의 개'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며 탐라지등의 기록에는 함덕에 강림사가 있었다고 전한다.
# 조선 태조 ‘실세’, 강영의 유배지
'강영의 개'란 조선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의 사촌 오빠로 그는 전라 감사까지 지낸 당시의 실세였다. 그러나 태종 이방원이 실권을 장악한 이후 1402년(태종 2) 제주로 유배당했다. 강영이 제주로 유배된 것은 태조가 막내인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자 이에 태조를 도와 조건 건국에 큰 공을 세웠던 이방원이 군사를 일으켜 이방번과 이방석을 죽이고 개국 공신들을 처치한 1차 왕자의 난으로 인해서였다. 이 1차 왕자의 난 당시에 강영은 삭탈관직을 당하고 제주로 유배를 왔다.
강영은 입도 이후 제주 고씨를 아내로 맞아 세 아들을 낳고 이 고장에 정착하면서 마을 주민들에게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이곳 마을 사람들은 강영이 제주에 유배된 이곳을 '강영의 개(포구)'라고 한다.
함덕리는 1910년대까지 조천·김녕과 경계하고 있었으며, 신흥리와 분동된 것은 1924년 일제하의 일이었다.
최근 제주특별자치도 조사에 따르면 해안마을과 산간마을에 사는 노인들이 장수한다고 한다. 함덕리 사람들 역시 깨끗한 공기와 바다 등 자연환경 속에서 청정한 채소와 해산물을 먹으며 열심히 일해 온 건강인들이다.
이 마을 오지철 할아버지(78)는 “동네 아이들이나 놀던 해수욕장이 여름철에는 사람 나들기가 무섭게 꽉 찬다”면서 “그렇게 사람들이 오고 가니까 마을 발전에도 도움이 되는 것 같다”며 오래살고 볼 일 이라고 덧붙인다.
해수욕장을 따라 제주시 방향으로 해안도로를 따라가면 작은 어선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 함덕포구가 나온다.
# 도내 제일의 멸치어장, 이젠 명맥만
과거 함덕리는 도내 제일의 멸치 어장이었다고 한다.
일제시대에 일본 아라카와란 사람이 평사동에 살면서 멸치 가공 퇴비와 사료를 일본에 수출하여 굉장한 돈을 벌었단 말도 있다.
40톤급 선박만 해도 50여 척 부렸고 낚시 어선은 100여척이나 됐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30여척의 어선이 전부다.
관광을 온 사람들과 렌터카가 수시로 지나다니는 부산함 속에서도 차분히 출어준비를 하는 마을주민을 만났다.
“갈치 잡으러 가려고 준비중입니다. 어획이 많이 줄긴 했지만 그렇다고 하릴없이 가만 앉아있으면 쓰나요.”
북쪽으로 해수욕장인 바다와 남쪽으로 산쪽의 광활한 황무지 사이에 위치해 있으면서 이들 자연조건과 싸워 모두 승리한 함덕리 사람들. 아름다운 자연을 선물 받은 축복 속에서도 늘 근면성실함을 잊지 않았기에 지금의 마을을 만들어 놓을 수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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