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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그림자

제주한라병원 2011. 11. 9. 10:29

2010년 / 1월

 

꿈 그림자

 

오후, 지하철역에서 그와 여자가 만난다. 여자는 그의 손을 꼭 잡았고, 그는 여자를 보고 살며시 웃는다. 
“표정이 왜 그래?” 
“악몽을 꿨어.” 
“무슨 꿈인데?” 
“글쎄…… 잘 기억나지 않아.” 
그는 말할 수 없었다. 


꿈 속 세계는 그림자도 생기지 않을 정도로 강렬한 햇빛으로 가득했다. 여자는 한 손으로 하얀 햇살을 가리며 다른 손으로 그를 이끌었다. 그는 한쪽 눈을 찡그린 채 여자에게 끌려가며 미소 지었다. 여자는 그보다 앞서거나 아니면 뒤쳐졌다. 그들은 호수 주변을 느릿느릿 걸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호숫가를 감싸고 서 있는 은사시나무가 깨진 거울 조각처럼 햇빛을 잘게 반사했다. 여자가 그의 손을 놓고 앞으로 달려갔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뛰어가는 여자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왔다. 은사시나무 이파리들이 자잘하게 흔들렸다. 그 흔들림이 가슴 속에 새겨졌다. 그는 문득 고개를 돌려 주위를 천천히 둘러봤다. 은사시나무들과 하늘을 옮겨놓은 것 같은 호수, 그 옆을 뛰어가는 여자와 그 그림 같은 풍경 속에서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 그 자신이 눈앞에 그려졌다. 이 순간이 영원히 몸 안에 각인되길 바랐다. 그러면 여자를 볼 때마다 이 날의 풍경과 감정이 떠올라 언제든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순간 장면이 바뀌었다. 
지하실처럼 어두운 공간. 그는 그곳이 어딘지 모른다. 알 수 있는 것은 그 순간 그가 굉장히 지쳐있다는 것과 그런 그의 앞에 여자가 앉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목소리는 모래바람이 섞인 것처럼 메마르다. 
“그냥, 그렇다는 거야.”


여자는 그를 끌어안더니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크게 숨쉬었다. 평소 잠이 잔뜩 묻었던 때의 목소리로 그에게 말한다. 바로 이 냄새. 갑자기 이 냄새를 너무 맡고 싶었어. 유일하게 나만 맡을 수 있는 당신만의 냄새. 정말 그리울 거야. 그는 여자를 떼어놓지도, 끌어안지도 못한다.


  “그래서 상대는? ……그 사람?”
  여자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는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그는 여자의 팔을 푼다.


가끔 그리울까? 정말 그럴까? 
됐어. 그딴 소리 집어치워. 도대체 왜 찾아온 거야? 추억? 내가 보낸 그 시간들은 추억을 만들기 위한 것이었단 얘기군? 관둬. 추억이라니…… 날 기억하지 말아줘. 그거 알아? 누군가 상대를 추억으로 자리매김하는 동안에도 그 상대는 일초, 일초마다 뼈마디를 깎아내고 피 흘리고 있다는 거. 그런데 불쑥 찾아와서 추억이라니…… 여전히 이기적이군. 늘 모든 계획 혼자 세우고, 기약 없는 기다림에 익숙해지게 하고, 그러고선 자신이 지쳐서 떠나고……


모든 게 아득해진다. 여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있고, 그는 여자를 등진 채로 담배를 피운다. 그런데 들리는 목소리. 그래도 보고 싶을 거야…… 이것은 여자의 목소리인가, 아니면 그 자신의 목소리인가……


“아직도 악몽 생각해?”
지하철역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여자가 걱정스러운 듯 묻는다. 그는 주위를 둘러본다. 꿈 속 여자의 모습과 그의 앞에 서 있는 여자의 모습이 겹쳐진다. 그는 여자의 얼굴을 잠시 쳐다보다 괜찮다는 듯 한번 웃어주곤 이내 고개를 흔든다. 그래. 이게 현실이야.
여자가 그를 이끌고, 그는 여자의 손을 잡은 채 에스컬레이터에 오른다. 한 발짝 앞선 여자가 뒤돌아 그를 꼭 껴안는다. 그러더니 그의 이마에 살짝 입 맞춘다. 그는 품속에서 여자를 세게 안는다. 한낮에 지하철역을 지나는 사람들이 그들을 쳐다본다. 그는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여자가 있고, 이렇게 햇살이 따스한 날에 만나 포옹할 수 있고, 입 맞출 수 있고, 온기를 느낄 수 있으면 됐다. 
 

그는 여자를 올려다본다. 출구에서 햇빛이 새어 들어와 눈부시다. 그래도 알 수 있다. 여자는 평소의 그 편안한 미소를 짓고 있을 테지. 그는 여자가 입은 당신의 푸른 색 블라우스를 쓰다듬는다. 햇빛 때문일까? 언젠가 꼭 이런 일이 있었던 것만 같은 느낌이 강하게 밀려온다. 우린, 언젠가 만났던 걸까?
  “꼭 지금 이 순간이 과거 언젠가 있었던 일 같아. 저 햇빛, 에스컬레이터, 당신과의 포옹, 입맞춤, 그리고 당신이 입은 이 푸른 색 블라우스까지…… 정말 이렇게 생생한데……” 
 

그런데 여자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진다. 왜 그러는 거야? 당신 미소가 사라졌잖아. 왜 그러는 거야…… 그는 분명 여자를 안고 있는데, 여자는 점점 멀어진다. 두 팔에 닿은 촉감은 여전한데, 어째서 당신은, 당신 목소리는 이렇게 아득해 지는 거지? 
생생할 수밖에 없잖아, 지금 이 순간이. 이건 당신 꿈인 걸…… 당신 기억인 걸…… 


 여자의 목소리가 아득해 진다. 보고 싶을 거야, 정말. 가끔 그리울 거야. 눈부신 태양 속으로 당신 모습과 당신의 목소리가 빨려 들어간다. 그는 허공에 손을 내젖는다. 
문득 눈을 뜨니, 여자의 집 앞 카페다. 그는 여자의 무릎을 베고 누워있다. 잠시 잠들었나 보다. 긴장을 푼 채 누군가에게 몸을 맡기고 잠든 것은 아주 오랜만이다. 

 깼어?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 창밖에서 갖가지 색의 조명불빛이 새어 들어온다. 여자가 그를 내려다보고, 그는 여자를 올려다본다. 여자가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여자는 아무 말이 없다. 그는 두 눈을 꾸욱 감는다. 
 

그래. 알 것 같아. 무슨 말을 할지. 무수히 반복되었으니까. 
여자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는 두 눈을 꼭 감는다.

정작 기억하지 말아야 했던 것은 나일까? 모두 털어버려야 했던 것은 나일까? 그래서 그렇게 악을 썼던 것일까? 여기 꿈속의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실제 당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 내 기억 속의 당신일 뿐인걸. 그래도, 그래도 가끔은 이렇게 서로 다른 곳에 우리 육체가 있다 해도, 서로 다른 곳에서 이 꿈을 함께 꿀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가끔은 찾아와줘. 어쩔 수 없이 꿈에서 깨어나야 하겠지만…… 

그때 들려오는 목소리. 사장님, 사장님. 그가 눈을 떠보니 가게에 종종 찾아오는 대학원 후배 녀석 하나가 그의 앞에 서 있다. 
“어쩐 일로 초저녁부터 졸고 계세요? 그것도 간판 불도 안 켜고.”
그는 조금 멍한 상태로 가게 안을 둘러본다. 익숙한 풍경. 그래, 이것이 현실. 
손님이 바에 앉는 동안 그는 천천히 움직인다. 밖을 내다보며 간판 전원을 올린다. 지하계단과 가게 외부의 간판에 <풀하우스>라는 글씨가 환하게 빛난다. 

 “그런데 자네는 어째 양복을 입고 있나?”
 “연초부터 결혼식이 많네요. 친구녀석 결혼식 다녀오는 길이에요.”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오디오 앞으로 간다. 앨범을 뒤적이다 혼자 바에 앉아 있는 후배에게 묻는다.
 “오랜만에 자네 좋아하는 김동률 노래나 틀어줄까?”
 “사장님이 어쩐 일이세요? 절대 가요는 틀지 않으시면서. 오늘 이상하시네.”

 그는 시디 한 장을 꺼내 오디오에 넣으며 대답한다.
 “가끔은…… 일 년에 한 번쯤은 이런 날도 있어야지. 그게 사는 맛 아니겠나. 어쨌든 새해 복 많이 받게.”

 그러자 후배가 실실 웃으며 대답한다. 예, 사장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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