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한라병원

이명아명, 환자의 생명과 건강을 자신의 몸처럼 돌본다

연재종료코너/이준희사람세상

침대 맡 벽지의 검은 얼룩

제주한라병원 2011. 6. 2. 09:11

2009년/9월

가끔 그런 때가 있다.
 

오래 전 연락이 끊긴 지인들이 갑자기 궁금해지는데 그들에게서 불쑥 연락이 오거나, 우연히 책장을 넘기다 옛 연인의 사진을 발견했는데 길을 걷다 그 혹은 그녀를 만나는 경우, 또 이런 일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는 그런 때 말이다.   
 

그녀와 통화를 하던 때에도 나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그녀가 내게 불쑥 전화를 걸어온 것은 9월 중순쯤이었다. 휴대폰 액정에 뜬 그녀의 이름을 확인한 순간, 나는 반가운 마음과 의아한 마음이 교차했다. 내가 알기로 그때 그녀는 저 멀리 유럽 어디쯤에 있어야 했던 것이다. 돌아온 것일까? 수화기 너머의 그녀는 특유의 차분한 목소리로 안부를 물었다. 얼마 전에 한국에 돌아왔으며, 아직 여행의 열병에서 깨어나지 못해 일상에 적응하기가 힘들다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도대체 그 열병에서 깨어나고 싶지가 않다는 거예요.”
 

전화를 끊고 그녀를 만나러 가기 위해 외출준비를 하는 내내, 나는 조금은 열이 있는 듯 허둥대고 있었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실제로 나는 그녀에게서 전화가 오기도 전에 이미 그녀를 떠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된 데에 딱히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니어서 나는 더욱 당황했다. 하지만 이내 그런 생각들은 떨쳐버리기로 했다. 굳이 크리스마스나 기념일 혹은 연말 연초처럼 감수성이 예민해지는 날이 아니더라도 이 지구에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존재들이 동시에 외로움을 느끼는 그런 시기도 있는 법이다. 그리고 그 외로운 존재들의 제각각 다른 주파수가 우연히 맞으면 이렇게 만남으로 이어지기도 하는 게지. 
 

약속장소에서 만난 그녀는 청바지에 하얀 민소매 셔츠를 입고 오른쪽 어깨에는 커다란 카메라가방을 메고 있었다. 마치 지금 막 길고 긴 여행에서 돌아온 사람 같았다. 그런 느낌은 차림새 때문이 아니라, 그녀의 표정 때문이었다. 그녀는 나를 쳐다보며 저 먼 나라의 모래먼지들을 뚝뚝 흘리며 서 있었다. 실제로 그녀에게서는 모래냄새가 풍겨오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가 간 곳은 유럽 아니었던가? 내가 그것을 기억하는 것은 일 년쯤 전에 그녀의 송별파티에 찾아갔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송별파티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워낙 자유분방하고 사교적이었던 그녀이기에 그랬을 거다. 그때 그녀는 학교 근처의 작은 바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같은 학과 친구들이 자주 들락거렸던 데다, 그녀의 완만한 성격이 마음에 든 손님들의 출입이 잦아서 가게는 늘 북적였다. 내 기억에 그녀와 같은 과였던 남학생 몇 명과 가게에 들락거리던 손님 몇몇이 그녀에게 구애를 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누구와도 연애는 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단지 소문뿐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언젠가 가게에 맥주 한 잔을 하러 찾아갔다가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적이 있는데, 그녀는 연애의 무거움에 질색했다.
“한 곳에 붙들려 있고 싶지 않아요. 게다가 나라는 존재 하나만으로도 버겁거든요. 거기에 타인이 끼어드는 순간 아마 나는 미쳐버리고 말 걸요.”
그랬기에 그녀가 출국하기 직전에야 떠난다는 말을 했을 때도 놀라지 않았다. 언젠가 그녀로부터 떠난다는 말을 들을 거라고 예상했었는지도 모른다. 물론 불쑥 돌아온 그녀가 연락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지만.

“처음 얼마 동안은 영국에 있었어요. 아는 친구가 이미 영국에 나가 있었고, 그 친구 신세를 진 거죠. 일을 하기도 했어요. 새로운 장소, 새로운 기분. 그런 것에 적응하다보면 나라는 존재를 잊게 돼요. 고통을 더 큰 고통으로 잊듯이 말예요.”    
 

시내 한복판의 술집에서 치킨은 건드리지도 않고 맥주만 연신 마셔대던 그녀가 말을 꺼냈다. 나는 그녀를 쳐다봤다. 한국을 떠난 이유도 그 때문이었을까? 새로움을 찾기 위해. 그녀는 2층 창가에 앉아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다. 거리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고, 상점의 네온들이 환하게 밝히고 있었으며 지나가는 젊은 행인들과 취객들로 소란스러웠다.

“하지만 인간이란 참으로 무서운 동물이죠. 그 이국적인 풍경과 사람들, 그리고 생활이 점점 익숙해지더니 낯익게 느껴지기까지 하더라구요. 그리고는 내 안에 뚫린 구멍 안에 점점 잠식되는 느낌이었어요. 완전히 소멸할 거 같은 기분이요. 딱히 기분 나쁠 일이 없는데도 신경질적으로 변하고, 공허하고, 외롭고.”
 

그래. 그런 상태는 나 또한 충분히 공감한다. 딱히 이유가 없는 데도, 검은 물처럼 음습한 기운이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기 시작해 밖으로 쏟아질 것처럼 넘실대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있음에도 외로움을 느끼는 게 사람이라지 않은가? 아마 모두가 내면의 구멍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곳저곳을 떠돌았지요. 조금 익숙해지면 다른 곳으로 떠나고, 또 떠나고. 그러다 아프리카로 갔어요. 도시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었죠. 자연의 상태 그대로를 느끼고 더 자연에 가까워지고 싶었으니까. 그리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떠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우리가 앉아 있는 자리에 길들여짐을 느끼고 있었다. 딱딱한 나무의자와 팔 하나를 올리고 있는 테이블, 옆의 창문, 적당한 조도의 조명과 그림자, 그리고 적당한 크기로 차분히 울려 퍼지는 그녀의 목소리.
 

“그렇게 오래 머물던 어느 날, 숙소의 침대 옆 벽지를 들여다보게 되었어요. 늘 얼룩이라고만 여겼던 그게 사실은 누군가 아주 작은 글씨로 적어놓은 글귀더군요. 게다가 더 놀라운 것은 그게 한글이라는 거였어요.”
하긴 외국 어디에서도 한국 사람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집트 피라미드에도 한국 관광객이 써 놓은 글귀를 발견할 수 있다고.
 
“거기에 이렇게 써 있더군요. ‘떠나야 돌아올 수 있다.’ 그 글귀를 보는 순간,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역시 이유는 모르겠지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떠나고 머무는 것. 꼭 그것만이 아니더라도 우리 사람이라는 존재는 어떤 존재들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아야만 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녀가 한국행을 결심했다는 것은 비록 아프리카를 떠나는 것일 테지만, 원래 머물던 곳으로 돌아가는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가 균형잡는 일을 몸으로 터득하고 있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우리는 얼마간 더 이야기를 나누다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거리는 어두워졌고, 낮은 뜨거운 열기가 사라진 자리로 싸늘한 바람이 불어들고 있었다.
“우리 손잡고 걸어요.”
그러니까 오늘, 아니 지금 만요, 라고 난초꽃 같은 표정으로 그녀가 말했다.
 

때로 항상 짊어지고 다니던 보따리가 일순간 무거워져 누군가 손을 건네주길 간절히 원하는 때가 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함께 있으면 이런 식의 대화가 가능해지기도 한다. 그녀는 언제부턴가 그 무게에 시달려온 모양이었고, 실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라는 존재가, 그리고 내 안의 검은 구멍이 점점 무거워짐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여행길에서 잠시 만난 사람들처럼 함께 어둠이 내려앉은 아파트 단지와 주택가로 이어지는 골목길을 걸었다. 커다란 달이 떠 있었고, 드문드문 가을바람이 밀려왔다. 우리는 오래 걸었다. 어둠 속을 빠르게 스쳐가는 자동차들을 만나기도 했다. 골목을 지나 큰길로 나가는데, 문득 골목길 저편으로 사라지는 그림자를 본 듯했다. 눈을 부비며 그쪽을 쳐다보는데, 그녀가 왜 그러냐는 듯 바라봤다. 나는 미소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도로 옆에 만들어놓은 인공개울이 있었고, 우리의 시간도 아래로 흐르거나 혹은 위로 거슬러 오르며 흘렀다. 한참을 걸어 길의 끝, 두 갈래 길에 가까워지면서, 정체를 알 수 없이 나를 짓누르고 있던 무게가 점점 덜어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제야 아까 골목길 저편으로 사라진 그림자의 정체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길의 끝에서 그녀가 잡은 손을 놓았다. 길이 갈라지는 곳에 우리는 마주보고 섰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만나고 또 헤어질까. 그녀가 가방끈을 바짝 조이고 손을 흔들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다, 나도 그녀의 반대쪽 길로 천천히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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