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 12월
안녕, 이름들아
저녁 동안 대학원 열람실에 처박혀 있다 밖으로 나왔다. 옷깃을 여미고 담배에 불을 붙이는 순간, 수첩에 적어놓고도 잊고 있던 일들이 생각나듯 문득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이제 한 해도 다 갔구나.
막 어두워지기 시작한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크리스마스 캐럴과 연말을 맞이해 평소보다 더 화려한 색을 입은 것처럼 여겨지는 상점 간판들, 갈수록 계절에 맞게 쌀쌀해지는 바람. 나는 버스를 타는 대신 걷기로 마음먹었고, 학교를 빠져나와 걷고 또 걷고, 멈췄다가, 다시 걸었다. 내게 시간이라는 문제는 시계나 달력의 숫자가 아닌, 마음 속 지도의 형상에 달려 있었다.
한 해가 다 지났다는 것을 그리고 새해라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2010년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 마음 속 지도가 너덜너덜해진 것을 느낀다는 사실이다. 너무 낡아서 잘 보이지도 않는 그 지도에서 아련함을 느끼고, 하도 들여다봐서 누렇게 변색된 그 지도를 보며 늘 갈아치우자고, 고정된 동선에서 벗어나자고 각오했음에도 그렇게 하지 못한 나 자신에게서 질식할 정도로 독하게 풍겨 나오는 어떤 공허를 느꼈다.
걷고, 또 걷고, 멈췄다가, 다시 걸으며, 고양이를 키워보자고, 여행을 많이 다니자고, 술과 담배를 줄여보자고 생각하다보니, 문득, 2008년도에는 어떤 소망들을 갖고 2009년을 맞이했었는지 궁금해졌다. 그리고 그 궁금함의 끝자락에 몇몇 이름들이 딸려 나왔다. 정리할 틈도 없이 받아 넣어둔 명함처럼 쌓여 있는 이름들.
궁금함이 이름들을 끌어냈듯 이름은 또 다른 이름들을 끌고 나왔다. 내 시간을 꽉 채운 사람들, 한번 본 적도 없는 사람이나, 수줍게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던 사람들, 헤어진 연인들, 그리고 그 이름을 부르는 것조차 아득하게 멀게 느껴지는 사람들의 이름이다.
문득 이름의 주인들이 궁금해졌다.
그러나 그 궁금함이란 어쩌다 목격한 달처럼 이내 낮이 되면 시야 밖으로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차라리 지난 해 달력과 함께 떼어내 둘둘 말아 내 마음 속 창고 어디쯤에 넣어두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저러나,
내 육체는 생각과는 다르게 조심스럽게 그 이름들을 육체 밖으로 쏟아내고 있었다.
나는 걷고 또 걷다가, 멈췄다가, 다시 걷다가, 결국……
어느 인적 없는 골목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깊은 굴처럼 이미 오래전부터 드리워져 있었을 어둠의 한 복판, 그 자리에 우뚝 선 채로, 그 이름들을 조심스럽게 불렀다.
누구야,
……
누구야,
……
누구야,
……
그리고 누구야……
제각각 다른 음절이나 어감만큼이나 다양한 기억들을 남긴 이름들과 그 주인들이, 이내 바람에 날려 골목 여기저기로 흩어졌다. 그 이름들의 부재로 인한 상실감에, 혹은 예상치 못한 그 이름들의 과한 존재감에 나는 이즈막이, 아니 벌써 한참 전부터 외로웠던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거대한 우주 안에서 ‘나’라는 행성은 궤도를 돌며 얼마나 많은 행성들을 스치고 지나가는가. 결국 살아간다는 건, 그 만남의 기억들을 마음 속에 간직했다 비워내기를 반복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골목을 빠져나가며, 걷고, 또 걷다가, 고양이나 여행 등등은 길 뒤로 잠시 밀어두고, 내 기억 속 많은 이름들을 길가의 짙은 어둠에게 잠시 맡기기로 한다. 골목을 빠져나갈 즈음에는 그나마 많이 가벼워져서, 이제 새로운 이름들을 이름 그 자체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그렇게 한 해의 끝과 다가올 새해를 기념할 수 있게, 걷고, 또 걷다가, 잠시 멈춰 서서 빌어본다.
어둠아, 그러니 잠시만 너를 빌려다오.
나지막하게 중얼거리는데, 벌써 여러 해 빚을 지고만 있는 바람이 불어온다. 바람이 차다. 나는 다시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