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 2월
캐빈
2.
“오빠는 왜 늘 혼자와요?”
“어! 나 사람들이랑 자주 오는데…….”
“어휴. 그런 말 아닌 거 알잖아요. 대부분 혼자 오니까 묻는 거죠.”
한번은 이것저것 묻기 좋아하는 S가 특유의 높은 톤으로 불쑥 말을 걸어왔다. 나는 혼자 앉아 있었고, S는 다른 일행 세 명과 함께였다.
S는 캐빈에 출입하던 또다른 손님이었다. 그때 스무 살이었던 S는 캐빈 근처 큰 병원의 종합검진센터에서 일하고 있었다. 나는 뜻밖의 질문에 웃으며 고개를 돌리다 S의 일행들 중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도 나도 황급히 시선을 거뒀다. 내가 정식으로 인사한 것은 S뿐이었지만, 나는 늘 S와 가게에 찾아오는 그녀를 알고 있었다. 긴 생머리를 등 언저리까지 기르고, 늘 창백한 표정으로 말없이 앉아 있는 사람. S와 다른 일행들이 말하기를 좋아하는 것과는 다르게, 항상 듣기만 하거나 가끔 호응해주기만 하는 사람. 그녀와는 늘 눈이 마주치곤 했다.
“어쩐지 혼자인 게 편해서요.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할 때면 늘 그들의 시간에 맞춰야 하잖아요. 나는 이 만큼 마시면 됐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게 아닐 수도 있으니까. 그러면 어떤 의무감 같은 게 나를 무겁게 짓눌러요.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해야만 한다는 강박도 느끼고…… 그냥 혼자 음악을 듣고, 생각하면서 마시는 걸 좋아해요.”
나는 S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말했지만, 내가 말하는 동안 S 옆에 앉은 그녀가 나를 슬그머니 쳐다보고 있으며 또 내 말이 끝났을 때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잠시 대화를 한 뒤에 그네들의 화제는 다시 그들의 병원 이야기로 돌아갔다. 나도 그쪽에 관심을 끊고 내가 구워온 시디들을 반복해서 들었다. 사장님은 텔레비전 화면을 응시하다 가끔 고개를 돌려 이쪽을 쳐다봤다.
그녀를 다시 만난 것은 2주쯤 뒤였다.
어쩐 일인지 가게에 손님이 없었다. 사장님이 내 앞에 재떨이와 맥주를 내려놓는 사이, 나는 시디를 골라 오디오에 넣었다. Eva cassidy와 Elliott Smith…… 담배를 피워 물었고, 깊게 빨아들인 뒤 길게 내뱉었다. 뿌연 담배연기 사이로, 캐빈의 출입문이 열리고 그녀가 가게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번에는 혼자였다.
이런 바를 혼자 찾은 게 처음이었는지, 그녀의 표정에서 조금은 경직되고 어색한 그림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는 내 앞쪽에 앉았다. 정면은 아니고, 의자 두 개 정도 비껴있는 자리였다. 그녀는 데낄라 슬래머를 주문했다. 사장님이 그녀에게 맥주를 가져다주는 동안 그녀와 내 시선이 어색하게 마주쳤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조심스럽게 인사를 나누었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낮은 음악소리와 사장님이 보고 있는 드라마 속 인물들의 목소리가 실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급기야는 시디가 다 돌아가 음악마저 끊겨버렸다. 이상하게 조용하네요. 나는 사장님에게 말을 꺼냈다. 사실 나는 좀 허둥대고 있었다. 다른 시디를 꺼내 오디오에 넣은 뒤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Damien Rice의 <The Blower's Daughter>. 건조한 목소리와 함께 기타반주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다 그녀와 나는 자연스럽게 몇 마디 주고받게 되었다. 한 공간 안에서 몇 번이나 마주친 사람들끼리 가능할 소통이었다. 둘 사이의 어색한 간격은 드라마 시청을 마친 사장님이 채웠다. 사장님에게는 그녀나 나나 다 같은 단골이었다.
“클로져라는 영화 좋아하세요?”
그녀가 불쑥 질문을 했다. 좋아했던가?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인상적인 영화라는 생각은 했지만 좋아하는지에 대해서는 딱히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 영화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게 있다. 그 영화를 봤던 순간들 - 조금은 추웠던 실내, 짓눌러 꺼버린 담배꽁초와 부유하는 담배연기 같은 것들. 그리고 내 어깨에 드리워진, 나와 함께 영화를 보던 어떤 이의 그림자.
“그냥 애증관계라고 해둘게요. 이 음악을 들으면 사랑과 고통이 함께 느껴져요. 사랑했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것인지, 아니면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사랑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는 동안, 이제 거의 다 지워졌다 여겨지는 것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사람은 때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훗날 기억이 될 어떤 시간들을 다른 대상에 투영시키기도 하는 것이다. 예컨대 비밀번호를 찾기 위한 질문과 답처럼. 비밀번호는 바뀌더라도 질문과 답은 변하지 않고 따라온다. 나 또한 그런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그 노래에 투영된 대상은 이제 없지만, 노래 그 자체는 기억에 채워진 자물쇠에 꼭 맞는 열쇠처럼 남아 있었다. 이런 생각들을 하는 사이, 어쩐 일인지 그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무언가 걱정거리를 떠올린 사람 같은 표정을 하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약 이십 분쯤 뒤에 나는 계산을 하고 나무계단을 하나씩 밟으며 밖으로 나갔다. 거리에 사람은 별로 없었다. 싸늘한 바람이 불어와 잔뜩 웅크리며 발걸음을 떼려는 찰나, 캐빈 출입구 근처 담벼락에 드리워진 어둠 속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잠시, 어쩌면 오래, 그 어둠을 응시했다. 고백하자면, 그 순간 나는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우리가 만난 시간은 그 초겨울부터 봄까지였다. 그리고 그 시간들은 내가 어둠을 응시하던 그 순간 예상했던 것들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아니, 그 때에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녀와 지낸 시간을 일일이 열거할 필요는 없을 게다. 우리는 아주 가끔 만나 말없이 술잔을 기울였고, 그러고 나선 내가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줬다. 이런 사실을 주변 사람들이나 S, 그리고 캐빈 사장님에게 말한 적은 없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사장님은 알고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관계를 확정지은 적은 없지만, 나는 그녀를 내 기억의 틀 안에 넣었던 게 분명하다. 대상없는 질문과 답, 자물쇠와 열쇠가 공허하게만 느껴졌던 탓이리라. 공허를 견디지 못해 그 자리를 다른 사람으로 채워버린 나는 분명 어렸다. 그러나 그녀도 비슷한 과정을 겪었던 것 같다.
“처음 만났을 때, 고통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했잖아? 그 때 문득 이렇게 될 거 같다는 생각을 했던 거 같아.”
우리가 더 이상 만나지 않게 되기 얼마 전쯤에 그녀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도무지 우리 관계를, 그리고 그녀의 생각을 알 수 없다고 생각하던 시기이다. 그때 나는 그녀가 말해준 덕분에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나를 만나기 훨씬 전부터 만나온 남자에 대한 이야기, 예정된 그와의 결혼, 흔들리는 마음, 그리고 그 와중에 불쑥 나타난 나라는 사람, 아니, 정확하게는 내가 내뱉은 말들. 이런 삼류 드라마같은 이야기,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목을 조르는 것같은 고통을 느끼는 사람.
“그 말은 오래 전에 알던 사람이 했던 말이거든. 사랑과 고통의 무게에 대해서. 그 말을 듣는 순간 지금 나를 누르고 있는 것들을 모두 벗어버릴 수 있을 것만 같았으니까.”
그녀는 기억 속의, 대상은 사라진 채 사랑과 고통이라는 단어만 떠돌고 있는 방에 나를 넣어놓았음이 분명했다. 그렇게 해서 그녀는 자유로울 수 있었을까? 지금의 혼란 속에서 길을 찾고, 어둠을 밝히고, 사랑과 고통의 무게를 가늠할 수 있었던 걸까? 그 당시에 나는 그것에 대해 아니라고, 절대 그럴 수 없다고, 하나의 단단한 기둥을 붙잡고 서 있어도 휘청거리는 게 인생이라고 끊임없이 외쳤다. 그것은 일종의 투정이었고, 푸념이었고, 나 자신의 마음을 가다듬으려 한 말이었을 게다.
그리고 그것들은 모두 내 기억과 경험의 틀 안에서 비롯한 것들이었다. 더 이상 대상을 잃고 싶지 않아서, 대상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서 해방되고 싶어서, 그리고 대상을 잃은 뒤 찾아올 공허를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아서.
나는 이 모든 것들을 그 해 봄, 그녀가 내가 항상 말해왔던 것들, 그러니까 이런 관계를 통해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 또한 혼란 속에서 길을 찾고, 어둠을 밝히고, 사랑과 무게를 가늠하는 것은 더 불가능하며, 하나의 단단한 기둥을 붙잡고 서 있어도 휘청거리는 게 인생이라는 것을 깨달은 뒤 그에게 돌아갔을 때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내가 한 번도 그녀를 그녀 자체로 본 적이 없다는 것을, 내 과거의 기억과 담벼락에 드리워진 어둠을 노려보며 예상했던 것들을 통해 그녀를 보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이렇게 지난 시간이란 언제나 한 인간에게 또 하나의 렌즈가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러나 늘 그렇듯, 그것을 아는 것은 모든 것이 끝난 뒤인 것이다.
그녀가 떠나고 한참의 시간이 흘러 캐빈에 갔다. 캐빈에 컴퓨터가 들어오고, 그리하여 손님들의 시디가 모두 수납장에 넣어진 이후의 일이다.
나는 혼자 앉아 맥주를 마시고 있었고, 저 옆쪽에는 오랜만에 얼굴을 본 S가 일행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녀는 없었다. 그러는 동안 나도 모르게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는 지경이 되었다. 혹 그녀의 이야기가 나오지는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러나 그들의 대화에 그녀는 등장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S와 그녀의 친구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산을 하는 모양인지 S가 카운터로 가까이 걸어 왔다. 그런데 사장님이 그녀의 이름을 대며 안부를 묻는 것이다. 나는 순간 움찔하며 사장님을 쳐다봤고, 그 순간 사장님은 나와 마주쳤던 시선을 슬며시 돌렸다.
“그 언니 유학 간다고 했는데, 갔는지도 모르겠네요. 그 뒤로는 연락이 없어요.”
내가 들은 것을 믿을 수 없었다. 당연히 이미 결혼을 해서 잘 살고 있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연 그녀는 정말 유학을 간 걸까? 아니면 다른 이들에게는 그렇게 이야기하고 그와 결혼을 한 걸까? 그러나 이런 것들을 물어볼 수는 없었다. 또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사랑과 고통의 무게를 미리부터 짐작하고 움직일 필요 없고, 또 그럴 수 없는 것처럼.
컴퓨터 음악검색창에 <The Blower's Daughter>를 써 넣었다. 나는 이 노래를 한동안 듣지 않고 있었다. 프로그램이 돌아가는 동안 잠시 생각했다. 이 노래가 흘러나오면 어떤 느낌이 들까. 그리고 혹 언젠가 이 노래를 듣고 있는 동안 캐빈 출입문이 열리며 그녀가 들어온다면, 그때는 내 기억의 테두리가 아닌 온전한 그녀 자체만을 쳐다볼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