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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종료코너/이준희사람세상

내 수첩들

제주한라병원 2011. 6. 2. 09:14

2009년/11월

내 방 한 구석에 상자가 하나 있다. 나는 상자를 연다. 상자 안에는 수첩들이 있고, 수첩 안에는 많은 이야기들이 적혀있다. 첫사랑의 감정이나 거짓말을 들켰을 때의 수치심, 영화나 소설에 대한 단상, 잊고 싶지 않은 꿈들, 그리고 불쑥 떠오르던 기억들. 오래된 것들이지만 하나도 버리지 않고 모아두었다. 어떤 수첩은 끝까지 꽉꽉 채워져 있고, 다 채우지 못한 채 도중에 바꾼 수첩도 있다. 
 

내가 무언가를 본격적으로 적기 시작한 것은 1998년부터였다. 그때 나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고 수학능력시험을 앞두고 있었다. 나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공부에 두각을 나타내지도, 그렇다고 말썽을 부리거나 왕따 취급받는 학생도 아니었다는 얘기다. 숨겨진 인생의 목표나 삶의 의미 등에 대해 딱히 생각해본 일도 없었다.      
 

생활에 변화가 생긴 것은 누군가의 예언 때문이었다. 노스트라다무스. 그는 1999년에 지구가 멸망할 거라는 예언으로 많은 사람들을, 특히 98년도나 99년도에 수능시험을 볼 몇몇 학생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마치 요즈음 2012년 종말론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처럼. 실제로 그 시기에도 지금처럼 불안한 요소들이 많았다. 종말을 다룬 영화들이 개봉되는가하면, IMF체제 하에서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그때에 나는 몇몇 친구들과 함께 동아리방이나 운동장 벤치에 앉아 종말론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우리가 가장 비극적으로 생각했던 것은 바로 대학에 가까스로 입학하여 99학번으로 입학한다고 한들 일 년도 채 다니지 못하고 우주의 먼지로 사라져야 한다는 점이었다. 더 불안한 것은 선생님들조차 지구의 멸망에 대해 부정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언젠가는 그럴 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사람도 있다. 99년에 멸망한다면 너희에게는 아직 일 년 정도의 시간이 더 남았으니 앞으로 몇 그루나 더 심을 수 있다.”
 

왜 스피노자가 배도 귤도 아닌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말했는지는 모르겠다. 문제는 나였다. 나는 불현 듯 세계 이면의 또 다른 세계를 알게 된 영화 속 주인공처럼 그때까지 당연하게 여기던 일상에서 벗어나려 발버둥 쳤던 것이다. 수업을 빼먹고 영화를 보러 다니거나 만화방에 갔고, 참고서보다는 소설을 더 많이 읽었다. 
 

그때부터 나는 보거나 느낀 모든 것을 작은 수첩 하나에 모조리 적기 시작했다. 내가 수첩에 적기 시작한 것은 현재의 일들만은 아니었다. 오래된 기억들이 불쑥 떠오르면 즉시 수첩을 꺼내 적었다. 나와 내 기억들과 그리고 내가 살았던 세상의 이야기들을. 나는 점점 더 많이 기억할 수 있었고, 수첩의 수는 갈수록 늘었다. 수첩에 적힌 이야기는 때론 가족에 대한 것이고 내 유년시절에 대한 것이었으며 기억하고 싶거나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에 대한 것이었고 또한 다른 이들이 들려준 이야기이기도 했다. 내가 많은 것을 기억하고 싶은 것은 나와 타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 기억들은 오히려 더 멀어지게 하기도 했다. 여러 경험들과 기억들을 통해 사람들을 대하는 데에 익숙해졌고, 그것은 섣부른 판단이 되거나 혹은 오해를 불러왔던 것이다. 그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세상을 사는 사람들의 모습은 우주에 떠 있는 여러 행성들 같았다. 그리고 그 궤도를 만들어 내는 것은 그들의 기억인 듯했다. 사람들은 이미 지난 일들을 떠올리거나 혹은 새로운 기억을 쌓아가며 자전을 하고 공전을 했다. 저마다의 궤도가 달랐음에도 서로 내두른 팔에 상처 입을 때도 있고, 혹은 정말 기적처럼 서로 멀리 떨어져 있던 행성이 악수하고 지나듯 우연히 스쳐가기도 했다. 그걸 알면서부터는 내 기억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기억도 기록하고 싶어졌다. 
 

나는 여전히 무엇인가를 수첩에 적곤 한다. 그 안에는 당신에 대한 기억들도 있다. 버스에서 만난 당신, 꿈속에서 만난 당신, 길 한복판에서 서럽게 울던 당신, 내 구두를 밟고 지나간 당신, 종적을 알 수 없게 사라져버린 당신…… 하루에도 몇 번씩 무수히 많은 당신과 만나고 또 헤어진다. 서로의 기억들 때문에 그리고 오해 때문에, 혹은 전혀 알 수 없는 이유들로 인해. 사라지는 것들을 보는 것은 슬픈 일이다. 가끔 당신과의 만남 그리고 헤어짐이 가슴 한 구석을 먹먹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우리 모두 우주를 이 세계를 떠도는 존재들이고, 그 와중에 만나고 헤어지는 건 사람의 뜻만은 아니라는 것을 이제 알겠다. 
 

나는 수첩에 적은 것들을 통해 당신을 확정짓거나 예상하거나 결론짓지 않기로 한다. 다만 바랄 뿐이다. 기억을 안고 살아가다가도 쓰윽 튀어나와 내 기억과 기억 사이, 그리고 타인의 기억과 내 기억 사이의 틈 안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을 수 있기를, 그리하여 나 자신과 당신에게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를 말이다. 
 

수첩이 가득 든 상자를 닫고 창문을 연다. 하늘에 커다란 달이 떠 있다. 새벽이 밝아오면 달은 사라진다. 사라지는 달을 보고도 슬프지 않은 것은 보지 못할 뿐 있어야 할 그 자리에 늘 있다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조바심 내는 것은 그토록 밝게 빛나던 달이 낮이 되어 잠시 사라졌다 다시 밤이 되었는데도 영영 나타나지 않을까봐, 달을 잃은 무수히 많은 날을 견디다 결국 그토록 아름답던 달이 있었다는 것조차 잊을까봐서…… 그래서 나는 지금, 수첩을 꺼내 달에 대한 이야기들을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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