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4월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그녀가 말을 꺼냈다.
“그냥 같이 나가서 한 잔 해요. 크리스마스잖아요. 게다가 난 차비도 없다구요. 집에 가서 지갑을 가져 나올게요. 내가 술을 사면되지요.”
크리스마스…… 일 년에 하루 밖에 없는 날, 그래서 뭔가 들뜨게 하는…… 그러나 그때마다 휩쓸리며 살아간다면 어쩐지 내 삶이라는 것이 절대 내 것이 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옳고 그름을 떠나서, 그냥 절대 납득할 수 없는 것들도 존재하는 것이다.
나는 고개를 젓는 대신 지갑에서 버스카드를 꺼내 그녀의 손에 들려주었다. 그녀는 처음에는 그게 뭔지를 한참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없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돌아보지 못하고 마냥 앉아 있다가 화장실로 갔다. 그게 최선의 방법인 듯했다.
자리로 돌아와 보니 그녀는 가고 없었다. 나는 담배를 피우며 남아 있던 술을 들이켰다. 앞에 있던 바텐더는 굉장히 죄송하다면서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겠다고 말했다.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과연 바텐더가 내게 미안해야 할 일인지, 아니면 그녀가 내게, 내가 그녀에게 미안해야 할 일인지 쉽게 판단이 서질 않았다. 계산을 하기 위해 바텐더를 불렀더니, 옆에 앉았던 그녀가 모두 계산을 했다고 말했다.
나는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밖으로 나오니, 사람들이 연인들이 혹은 혼자인 사람들이 거리를 지나갔다. 크리스마스였다. 평소와 비슷한 풍경일 텐데, 크리스마스여서 더 다르게 느껴지는 것일 테지.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고,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그 새벽, 그곳에 아는 이는 하나도 없었다.
그녀를 다신 만난 것은 그로부터 약 두 달 쯤 뒤였다. 만났다기보다는 봤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할 듯싶다. 학교에서 세미나가 끝난 뒤 늦은 송년회 겸 사람들과 흑석시장 쪽 정육식당에서 저녁을 먹고는 자리를 옮겨 간단히 맥주를 마셨다. 생각보다 자리가 길어졌고, 시간이 더 흘러 나는 막차 시간에 맞춰 먼저 밖으로 나왔다.
거리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예정에 없던 비였다. 사람들이 도로를 가로질러 뛰어다니고 있었다. 나는 가게 간판 아래에 서서 담배를 피웠다. 아무래도 쉽게 그칠 비가 아니었다. 나는 우산을 사기 위해 편의점 쪽으로 뛰었다. 편의점에서 작은 우산과 담배를 산 뒤 밖으로 나오는데, 안으로 들어오려던 커플로 보이는 남녀와 잠시 문을 밀었다 당겼다 하는 접촉이 있었다. 우리는 서로 말없는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까닥였는데, 조금은 경계하듯 쳐다보던 여자의 얼굴이 어딘지 낯이 익었다. 그녀가 크리스마스 때의 그녀였다는 것을 알아챈 것은 조금 뒤였다.
버스정류장으로 한참을 걸어와 버스를 기다리며 서 있는데, 조금 전 커플이 버스정류장을 지나 원룸들이 밀집한 언덕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팔짱을 끼고, 앞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잔뜩 움츠린 채로. 나는 바람이 불어오는 쪽을 향해 우산을 기울인 채 서 있다가 내 곁을 지나는 그들을, 아니 정확히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이었지만 그녀는 살짝 들어 올린 우산 사이로 나를 쳐다보더니 혀를 쭉 내밀었다. 그리고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옆에 선 남자의 팔짱을 더욱 꽉 끼면서 걸어갔다. 어쩐지 이유 없는 웃음이 새어나왔다. 고개를 돌려 언덕 위쪽을 보았다. 우산 아래 걸어가는 두 사람의 모습이 마치 한 덩어리인 듯 보였다.
그 뒤로 나는 그녀의 존재를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학교를 마친 뒤 제주도로 왔고, 지금까지도 여전히 제주에서 지내고 있다. 흐르는 시간 사이에서 어쩌다 한 번씩 그녀를 떠올렸던 때가 있다. 그때에도, 맞아, 그런 일도 있었지, 정도의 회상이었다.
그러다 얼마 전 해결해야 할 일들이 생겨 서울에 다녀왔다. 나는 학교에 가서 일을 마치고는 <풀 하우스>에 잠시 들렀다. 그곳도 예전 같지 않았다. 사장은 그대로였지만 매니저와 바텐더 등 직원들이 바뀌어 있었다.
나는 사장님과 잠시 안부를 주고받았고, 늘 그랬던 것처럼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앉아 칵테일 한 잔을 마시고 있었다. 테이블은 거의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손님들로 꽉 차 있었고, 바에도 나를 포함해 네 명의 사람이 앉아 있었다. 두 명의 남자가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혼자 온 여자 손님은 새로 온 매니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처음에는 누군지 알아보지 못했는데, 바로 그녀였다. 신기하기도 하고 괜히 반가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따로 아는 체를 하지는 않았다. 시간이 조금 지나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계산을 하러 카운터 쪽으로 걸어가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조금은 어색하게 소리 없는 인사를 주고받았다. 그러는데 이렇게 우연히 보는 것도 마지막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저 멀리 미래에서 텔레파시를 보내듯 불현듯 이런 느낌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잠시 앉아 있다 화장실에 다녀와 보니, 내 자리에 무언가가 놓여 있었다. 나는 바텐더에게 누가 이 자리에 다녀갔냐고 물었더니 바텐더는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나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우두커니 앉아 있다, 술을 한 잔 더 주문하고, 그러다 계산서를 정리하고 있는 사장에게 말했다.
“사장님 저 <전화카드 한 장>이라는 노래 틀어주시면 안 돼요?”
그러자 바쁘게 일을 하던 사장이 분주하던 손을 멈추고는 어이없다는 듯 대답했다.
“미쳤군. 몇 개월 떠나 있었다고 가요를 절대 틀지 않는다는 우리 가게 룰을 잊은 겐가? 게다가 그건 민중가요잖아!”
사장은 말을 이었다.
“그게 아니면 눈이 나빠진 겐가? 아니면 세상 물정 모르는 바보가 된 거야? 버스카드를 들고 전화카드 한 장을 틀어달라니, 쯧쯧.”
나는 의미 없이 그냥 웃으며 그러게요, 라고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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