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1월
1월은 ‘야누스의 달’이라 불린다고 한다.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처럼 지난해의 연장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해를 여는 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과거와 미래를 잇는 통로인 셈이다. 그래서인지 1월이 되면 부쩍 과거를 정리하려는 습성이 짙어지고 또 그 어느 때보다 미래에 대한 기대가 커진다.
과거를 정리하거나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우는 데에 있어 어떤 요소에 비중을 두느냐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그래도 가장 일반적인 것을 들라면 그건 바로 ‘사람’ 아닌가 싶다. 연말이나 새해를 맞이했을 때, 혼자 보내고 싶지 않아 함께하고픈 사람을 찾거나, 또 주변 사람들의 화목과 행운을 비는 새해인사를 건네는 습관을 봐도 그렇다. 사람은 누구나 혼자 살아갈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내가 이 세상 어디쯤에 서 있는지를 가늠하기도 하는 것이다. 마치 거울을 보듯이, 그게 여럿이든 단 한 사람이든 간에.
물론 나도 그런 거울을 갖고 있다.
대학에 다니던 시절, 학교에는 손금을 잘 보기로 유명한 교수님 한 분이 계셨다. 교수님은 종종 학생들의 손금을 봐주시곤 했는데, 그 손금풀이가 꽤 신빙성이 있다는 소문이 퍼져 학생들은 틈만 나면 교수님께 손을 내밀곤 했다. 나도 언젠가는 꼭 부탁드려봐야겠다고 벼르고 있는 학생 중 하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기회가 찾아왔다. 연말이 되어 교수님을 모시고 어느 식당에서 저녁을 먹게 되었던 것이다. 학생들은 다들 교수님이 손금을 봐주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선뜻 교수님께 말을 꺼내지 못하고 다들 눈치만 살피며 네가 부탁해보라는 무언의 압력만 서로에게 가하고 있었다. 그러다 자리가 무르익을 즈음 어떤 친구 하나가 용기를 내어 선생님께 부탁드렸고, 술이 슬슬 오르기 시작하신 교수님은 흔쾌히 학생들의 손금을 보기 시작하셨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는데, 나는 적잖이 실망하고 말았다. 다른 학생들에게는 지금의 상태와 미래에 대한 말을 자세히 해주시더니, 내게는 딱 한 마디로 잘라 말하시는 것 아닌가!
“준희씨는 선을 택할 겁니다.”
“예?”
“준희씨는 선의 길로 갈 수도 있고, 악의 길로 갈 수도 있는데, 결국 선을 택할 거라고 믿어요. 알겠죠?”
여기서 끝이었다. 비록 교수님은 진심어린 말투로 내게 말했지만, 이 얼마나 뜬금없는 이야기인가! 이런 식으로 손금풀이가 끝나자 기대로 차 있던 마음이 금세 허탈해졌다. 잔뜩 벼른 만큼 뭔가 특별한, 그리고 긴 이야기를 듣고 싶었던 것이다. 게다가 선과 악의 선택이라니. 그것은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이야기 아닌가!
그러나 이내 생각을 고쳐먹기로 했다. 당연한 이야기를 굳이 한 데에는 이유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나는 그 이유를 알아내겠다는 다짐 아래, 선생님의 말씀을 머릿속에 넣어두고는 틈이 날 때마다 꺼내보았다. 하지만 그 의미를 찾아내는 일은 쉽지 않았고, 대신 선생님의 그 이야기만 몸과 마음속에 둥둥 떠다녔다.
사실 시간이 한참 흐른 지금까지도 나는 그 의미를 알지 못한다. 다만 가끔 선생님 말씀이 불쑥 떠올랐고, 그때마다 삶의 어느 길에서든 옳은 길을 택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바람을 갖게 되었다. 물론 늘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아니다. 그런 바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수를 연발했고, 또한 가끔은 너무 감정에 치우쳐 옳지 않은 길이라는 것을 알면서 그 길로 들어서는 때도 있었다. 그런 뒤에 가슴을 치며 후회하는 것이다. 대개의 사람이 그러하듯이.
그러던 중 한 사람을 알게 되었다. 몇 년 전 친구들과의 모임에 나갔다가 누군가를 따라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이었는데, 그게 계기가 되어 친해진 그녀와 나는 잦은 만남은 갖지 않더라도 종종 문자메시지를 남기거나 휴대폰 버튼을 눌러 대화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교류가 반복될수록 나는 그녀가 동화 백설 공주에 등장하는 마법거울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뭐, 누가 이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잘생겼느냐, 따위를 묻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어떤 일에 몹시 화가 나 있거나 고민에 빠져 허둥대고 있을 때, 그 마법거울은 내게 일종의 길을 보여주곤 했다. 길을 보여준다는 것이 내가 고민하는 문제에 대해 구구절절 답을 말해준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마법거울인 그녀의 존재 자체만으로 길을 제시하고 있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녀라는 거울이 내가 본 그 어떤 거울보다 투명하고 깨끗해 그 앞에 비친 내 허물이 더욱 잘 보이는 경우와 비슷한 것이다. 그래서 자꾸만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는……
그러니까 어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원고가 잘 풀리지 않아 집에서 슬그머니 빠져나와 시내 한복판을 휘청거리며 배회하기도 하고, 불쑥 찾아온 기억에 잠시 갈대밭 한 가운데 서 있는 듯 흔들리기도 하며, 때론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로막은 벽의 육중함에 상심해 되는 대로 살자며 다 때려치우고 싶었던 찰나,
바다를 건너온 전파에 휴대폰이 진동하고, 수화기로 들려오는 목소리!
“아직 바다를 보며 길의 어딘가에 서 있어요? 어디에 있든 차근차근 조금씩 움직여요. 안개는 쉽게 사라지지 않으니. 그리고 길고 긴 여행은 언제 끝나나요? 새해에는 얼굴 좀 보여 달라구요.”
거 참. 오랜만에 듣는 마법거울의 경쾌한 목소리에 또 순간 휘청거리던 내 자신이 선명히 보였던 것이지. 그래서 나는 흐트러진 마음을 추슬러 모아들고는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내게 거울이 되어준 그녀에게 감사하며, 또한 나도 그녀에게, 이 세상을 사는 누군가에게 마법거울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러니까 기회가 될 때마다 이 지면을 통해 소개할 짧고 사소한 이야기들이 나 자신에게도 그리고 여러분에게도 때로는 시간을 때울 수 있고, 또 때로는 잠시 잊고 있던 것을 돌아보게 하는 그런 마법거울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나저나 그녀와 통화를 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노곤한 잠에 빠져들기 시작한 그녀에게 슬쩍,
“그러니까 당신, 아무리 봐도 마법거울 같아.”
라고 속삭였는데, 과연 그녀는 들었을까?
뭐, 아무렴 어때……
2006년 신춘문예로 등단하고, 이후 세상 곳곳에서 많은 사람들과 만나며 소설을 쓰고 있다.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에 재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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