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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크리스마스 이야기 (1)

제주한라병원 2011. 6. 2. 08:54

2009년/2월

내가 다니는 학교 앞에는 <풀 하우스>라는 이름의 바가 하나 있다. 약 스무 개 정도의 크고 작은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고, 출입구 정면으로는 열 명 정도 앉을 수 있는 바가 있다. 이 가게에서는 병맥주뿐만 아니라 생맥주도 팔았는데, 술을 즐기는 내가 지금까지 마셔본 생맥주들을 전부 놓고 볼 때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맛을 자랑한다. 바에 앉으면 생맥주만 주문할 수 있으나 테이블에 앉으면 꼭 안주를 함께 주문해야 하는데, 같은 생맥주 한 잔이라고 하더라도 바와 테이블이 각각 그 양이 다르다. 이 가게의 룰인 셈이다.  

 

이 가게의 룰은 또 있다. 절대 가요를 틀지 않는다는 것. 사장은 음악마니아답게 한 면을 온갖 음반으로 가득 채워놓았는데 그 중 가요는 없었고, 혹 손님이 시디를 직접 들고 오더라도 그게 가요앨범이라면 절대 틀지 않았다. 가끔 사장과의 친분에 은근한 기대를 걸고 가요를 신청하는 손님들이 있다. 그때에도 사장의 입장에는 변함이 없었다.

“내가 이 가게를 지금까지 운영할 수 있는 이유가 뭔지 알아? 절대 룰을 어기지 않는다는 거야. 바에도 유행이라는 게 있거든. 그 유행에 흔들리지 않고 지금까지 이 바를 운영해올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절대 깨지지 않는 룰이 있기 때문이야.”   

 

사장은 문학과 음악, 영화 등 전반적인 문화에 대해 소양을 갖추고 있는데다 손님들과 대화하는 것을 좋아해 혼자 바에 들르더라도 심심할 일은 없었다. 또한 가끔 혼자 생각할 일이 있어도 사장의 대화하기 좋아하는 습성이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슬쩍 다가서서 손님의 마음 상태를 파악하고 혼자 사색할 수 있게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주는 센스까지 갖추고 있으니까. 손님에게 무작정 말을 거는 것을 능사로 여기는 가게가 아닌 것이다. 

나는 종종 그 가게에 들르곤 했다. 그러는 동안 가게 사장은 물론 직원들과도 친분을 쌓게 되었다. 그 중 바 안쪽에서 바텐더 일을 하는 두 명의 친구와는 꽤나 친해졌는데, 둘 모두 공연 계통의 일을 하는 친구들이었다. 아무래도 문학과 연극이라는 가지가 예술이라는 뿌리로 이어지다 보니 공유할 것도 많고 그 만큼 대화도 잘 통했다. 그 두 친구와는 그들이 가게를 그만 둔 뒤에도 드문드문 교류가 있었는데, 한 친구는 가끔 거리에서 만날 때마다 형님, 형님, 하면서 아는 체를 하거나 안부를 전했고, 다른 한 친구는 자신이 스태프로 있는 공연에 초대하기도 했다.   

 

이렇게 사장은 물론 직원들과도 친해지다 보니 어쩐지 그 바가 더욱 친근하고 편안하게 느껴졌다. 잠시 휴식을 느끼고 싶을 때는 물론 지인들과 술 한 잔을 하고 싶을 때, 그리고 흔히 외로움이라고 부르는 감기를 몹시 심하게 앓을 때, 나는 종종 가게를 찾았다.

 

몇 년 전 크리스마스 때에도 나는 가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크리스마스여서 주변 분위기가 다들 어느 정도씩은 들떠있었고, 나 또한 그랬다. 지하로 통하는 나무계단을 걸어 내려가는데, 가게에 틀어놓은 음악소리와 특유의 방향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날 가게에서 나는 뜻하지 않게 반가운 손님들을 만나게 되었다. 한참 전에 그만둔 몇몇 직원들이 가게에 놀러왔던 것이다. 우리는 나란히 바에 앉아 그간의 안부를 물으며 크리스마스이브의 저녁을 보내고 있었다. 늘 직원의 신분으로 이곳에 들락날락 했던 그들은 손님의 입장이 되어 바에 앉아 있게 되자 내심 감회가 새로운 모양이었다. 가게엔 손님이 거의 없었다. 특별한 날인만큼 가게의 주요 손님이던 대학생들이 연인 혹은 단체로 신촌이나 강남, 홍대 같은 주요 유흥가로 뿔뿔이 흩어졌기 때문이다. 사장에게는 좋지 않은 일이었겠지만, 그곳에 있던 손님들에게는 적당히 조용한 크리스마스를 보내기에 아주 좋은 환경이었다.

바에 붙어 우리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직원이 출입문을 향해 어서오세요, 라고 소리 지른 것은 열 시 즈음이었다. 이십 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여자 하나가 출입문으로 들어와 우리 일행이 앉은 바로 뒤의 빈 테이블에 앉았다. 한 손에는 잘 포장된 케이크가 들려 있었고, 다른 일행을 기다리는지 주문은 미뤄두었다. 그녀는 포장을 뜯지 않은 케이크를 테이블 한 가운데에 놓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드문드문 문자를 보내거나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을 뿐이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바에 앉아 있던 우리 일행들은 어느 새 그 여인에게 신경을 쓰게 되었다. 삼십 분, 한 시간이 지나는 동안 여자는 주문은 하지 않고 여전히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만 있었다.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지만 정작 통화는 되지 않는 눈치였다. 손님이 별로 없는 데다 크리스마스에 어울리는 조용한 음악을 틀어놓은 터라 바에 앉아 있던 우리의 목소리는 더 크게 울려 퍼졌고, 동시에 우리의 뒤편에 앉은 그녀의 처지는 더 확연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러다보니 어느 새 우리가 그녀의 눈치를 보는 형국이 되어버렸다. 
 

그러는 중에 그녀는 맥주를 한 병 주문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한 병, 그리고 또 한 병의 맥주를 비워버렸다. 나는 화장실에 다녀오다 흘끗 그녀를 쳐다봤는데, 그녀는 테이블에 가지런히 앉은 채 비 맞은 표정으로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결국 그녀의 상대는 끝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자정이 가까워질 무렵이었다. 맥주를 마시던 내 옆으로 상자 하나가 불쑥 무엇이 지나갔다. 그 바람에 하마터면 마시던 맥주를 도로 뱉어낼 뻔했다. 뒤에 홀로 앉아 있던 그녀가 나와 내 옆 사람 사이로 불쑥 케이크 상자를 들이민 것이다. 여자의 돌발행동에 놀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다들 멍하게 여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 케이크 나눠 드세요.”
바텐더를 비롯한 직원은 여자를 앞에 두고 어쩔 줄 몰라 했다. 물론 정중하게 사양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저에게는 더 이상 이 케이크가 필요 없게 되었어요. 어려분도 알다시피요.”
그래, 그것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우리의 관심이 자신에게 집중되어 있던 것을 알았던 것일까?
“그리고 아까부터 지켜보니 이 자리가 굉장히 재미있게 보이네요. 저도 합석하면 안 될까요? 이 케이크를 나눠 먹으면서요.”
 

난처한 상황이었다. 그렇게 느낀 것이 나 뿐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평소라면 한 마디로 손님을 제지했을 바텐더나 직원들도 우두커니 서 있을 따름이었다. 여자의 상황을 아는 터라 쉽게 거절하지 못하는 것이다. 크리스마스이브에 그 누군가에게 바람맞은 여자를 또다시 바람 부는 어딘가로 내쫓는 것은 너무 모질지 않은가. 그렇다고 타인과 타인이라면 누구나 지니고 있는 거리를, 그것도 생판 처음 보는 사람이 한 걸음에 성큼 건너 다가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도 쉽지 않은 노릇이다. 
 

여자는 조금은 취해 있었는지 주변의 이목은 신경 쓰지 않은 채 내 옆으로 의자를 끌어 오더니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나도 내 옆에 앉았던 일행들도 이쯤 되자 다들 어느 정도는 내버려두자는 눈치였다. 여자가 어느 정도 취해있었기에 곧 일어나지 않겠느냐는 심산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몇 병의 맥주를 비워내고, 잔을 부딪치는 동안에도 여자는 쉽게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 사이에서 더 신나서는 여차하면 소주라도 한 잔 더 하자고 나설 태세였다. 
 

더 난처해진 것은 그 다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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