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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크리스마스 이야기 (2)

제주한라병원 2011. 6. 2. 08:58

2009년/3월

나와 술을 마시던 일행들이 가게에서 일했던 직원들끼리 모여 따로 송년회를 한다며 일제히 일어나버린 것이다. 그들은 밖으로 나가면서 내게 미안한 표정을, 또 한편으론 짓궂은 장난 끼가 가득 묻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를 감싸고 있던 동질감에 선 하나가, 그것도 바로 내 앞에 주욱 그어진 기분이었다. 그러나 누굴 탓할 만한 일도 아니었다. 애초부터 그들과 나는 옛 직원과 손님이라는, 구분이 분명한 명찰을 차고 그 자리에 앉아 있었던 거니까.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일까. 예기치 않은 사건은 또다른 예상 못한 사건들을 불러 온다. 나는 예기치 못한 사건들을 무조건 피하고 보는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예전에는 그런 상황을 즐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호기심에 그런 상황으로 뛰어들게 되는 나이도 지나 있었다. 그런 상황들이 일상이라고 부르는 것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간에. 나는 그 미지의 상황이 풍기는 냄새에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신경을 곤두세우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여자가 내게 알려준 프로필에 따르면 그녀의 나이는 스물여섯, 들으면 누구나 알만한 대학교의 대학원(생물학 쪽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에 재학 중, 이쪽 학교와 자신이 다니는 학교 사이에서 자취를 하고 있는데, 학교가 약 이삼십 분 거리에 있었으므로 통학에 지장을 주지는 않음, 친구가 이쪽에서 자취를 하고 있어 자주 찾아오는 편이라는 것 등이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문득 우리가 타인이라고 뭉뚱그려 부르는 그 미지의 존재들이 비록 멀리서 볼 때에는 뭉뚱그려진 추상화 같지만, 제 각기 아주 사적이고 구체적인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실감하고 있었다. 그러는데 그녀가 내 프로필을 요구했다.


 

“저도 그쪽처럼 대학원에 다니고 있어요. 바로 이 앞에 있는 학교에요. 나이는 그쪽과 같고 사는 곳은 경기돕니다.”
 
“경기도요?”
“예. 늘 학교를 집인 듯 보내는 데다 왕복하는 시간도 있고 해서 대부분의 사적인 활동도 학교 근처에서 해결하고 있죠. 그래서 지금도 이 자리에 있는 거고요.”
“그럼 아까 그 사람들은요? 일행 아니었어요?”
“일행이라고 느꼈었는데, 아녔나봅니다. 뭐 사는 게 그렇죠. 지금 당장은 내편이거나 절대 떨어지지 않을 한 덩어리처럼 느껴지는데 막상 어느 순간 그게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는 거죠.”
“다른 사람들이 보면 그쪽과 나도 일행처럼 보이겠지요? 그러니까 한 덩어리.”
 

나는 짐짓 못 들은 체 하며 담배를 물었다. 그랬더니 그녀가 “자,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네요, 반덩어리씨. 메리크리스마스!” 라며 맥주잔을 들어 내 잔에 부딪쳤다. 어쩐지 이런 식으로 끌려가면 안 되겠다 싶어 선을 그으며 대꾸했다.
“비록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일행처럼 볼지라도 여길 나가면 서로 가던 길을 갈 거라는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여기 세 사람이나 있습니다. 나, 그쪽, 그리고 저기 서 있는 바텐더요. 그리고 이제 슬슬 다른 사람들에게도 진실을 알려줄 때가 된 거 같네요.”
“왜요? 사람들한테 방송이라도 하려구요?”
“아니요. 이제 슬슬 나가볼 참입니다. 막차 시간도 다 되어가니까요.”


 

그녀는 잠시 시계를 들여다봤다.
“그러지 말고, 우리 나가서 한 잔 더 해요.”
그녀가 몸을 이쪽으로 기울여오며 내게 말했다. 나는 순간 그녀의 얼굴을 쳐다봤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건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닌 거 같네요.”
“왜요? 이렇게 우연히 만나 술 한 잔 하는 게 나쁜 건가요?”
“좋고 나쁜 걸 떠나서 하는 얘깁니다. 모든 존재에게는 룰이라는 게 있죠. 이 가게에도 룰이라는 게 있어 세상에 넘쳐나는 바들 사이에서 지금까지 흔들리지 않고 잘 버텨왔던 겁니다. 저에게도 그 룰이라는 게 있다는 말입니다. 세상에 넘쳐나는 온갖 사건들 사이에서 나름대로 휘청거리고 실수도 하지만 여태껏 살아올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겠죠. 지금 말한 그건 그 룰에 위배되는 일이어서 하는 얘깁니다.”
“그것뿐이에요?”
“뭐 그렇다고 해두죠.”
“그럼 됐어요. 룰 따위는 집어치우고 쿨 하게 나가서 술 한 잔 더해요. 룰은 그 다음에 다시 정할 수 있는 거니까.”
“지금 그쪽이 하는 행동에 동조해 줄 수 없어서 하는 말입니다. 게다가 그 쿨 하다는 말을 저는 무척이나 싫어하거든요. 그 쿨 하다는 범위가 사람마다 달라 어느 정도까지를 쿨 하다고 봐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또 그 쿨 하다는 합리화 아래에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것을 알거든요.”  
 

그랬더니 그녀는 노인네 같은 소리는, 이라며 술을 들이켰다. 나는 말하는 김에 이젠 정말 선을 확실하게 긋고 어서 이 자리를 벗어날 방도를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그쪽 처지는 잘 모르겠지만 외로움의 끝에서 누군가를 만나는 게 해결책이 되지는 못한다는 걸 말하는 겁니다. 지금 당장은 절실하게 필요한 것 같아서 이렇게 떼를 쓰지만, 결과적으로 그게 자신을 옭아맬 수도 있는 거죠. 적절한 비유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사막에서 극심한 갈증에 눈앞의 물을 모조리 들이켰는데, 결국 더욱 갈증만 불러일으키는 것처럼. 어쩌면 다음 날 보니 그 물이 썩어 있을 지도 모를 일이구요.”
“삼장법사의 해골물을 얘기하는 건가요?”
“원효대사겠죠.”
“내가 외로워 보여요? 아니면 불쌍해 보여요?” 
“그렇다는 말은 아닙니다. 혹 예를 들자면 그렇다는 말이지요.”
 

대꾸가 없어 슬쩍 옆을 돌아보니 그녀는 반쯤 눈을 깔고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나는 방금 말한 것들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어째서 사람은 이런 식으로 잔인해지는 것일까. 이렇게 될 거였으면 애초에 동석하지 않은 게 더 나았을 것이다. 어째서 배려한답시고 시작한 일이 오히려 그 사람에게 상처가 되는 걸까. 어째서 이토록 서툴기만 한 걸까.
게다가 나는 모든 말들을 내뱉고 나서야 그 말이 그녀가 아닌 나 자신을 향한 말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녀는 한참이 지나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턱을 괴고 멍하니 앞만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가만히 앉아서 담배만 피워댔다. 그러는데 그녀가 말했다.
 
“룰이라니…… 나는 아무런 룰도 없는 여자 같아요? 그래서 이렇게 앉아 있는 거 같아요?”
“……”
“어째서 사람들은 자기에게만 룰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죠? 자기만 룰을 지키고 거기에 따라 살아가는 것처럼. 가끔 사람들을 보면 운동선수 같아요. 경기시간 내내 자기만 룰을 지키고 뛰어다닌 것처럼요. 상대가 어떤 지는 보려하지 않아요. 그 상대가 함께 뛰고 있는 같은 편 선수이거나 감독이거나, 아니면 경기 내내 숨죽이며 자신을 응원한 관중일 수 있는데, 마치 자신만 그 경기를 짊어지고 온 것처럼…… 이기적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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