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한라병원

이명아명, 환자의 생명과 건강을 자신의 몸처럼 돌본다

연재종료코너/이준희사람세상

Not Going Anywhere (2)

제주한라병원 2011. 6. 2. 09:03

2009년/6월

어느덧 버스가 종로 2가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그녀 일행이 내리는 것을 보고, 나도 허겁지겁 버스에서 뛰어내렸다. 거리는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는 사이, 잠시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그녀가 짧게 나를 돌아봤다. 그러나 나는 뒤돌아본 그녀의 시선을 온전히 받아낼 자신이 없어, 외면해버리고 말았다. 
 

신호가 파란불로 바뀌었고, 나는 몇 발짝 간격을 두고 그녀를 뒤따랐다. 도대체 뭘 어쩌려고 그러는지 나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녀에게 다가가 말을 걸지도, 다 관두고 돌아서지도 못했다. 그런데, 그녀의 눈치를 보며 따라가기만 하던 어느 순간, 날카롭게 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마치 살이 베인 것처럼 아려서 얼굴을 쓰다듬었는데, 그것은 막 나무에서 떨어지던 낙엽이었다. 그런 일이야 예사로 일어나는 일 아닌가. 그런데 그날에는 낙엽을 확인하자마자, 별안간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음습한 기운이 차올랐다. 숫자나 머리로 인식하는 게 아닌, 내 감각과 몸으로 느끼는 가을이 바로 그 순간 시작되었던 것이다. 
 

내가 걸음을 늦춘 사이, 그녀가 입고 있던 초록빛 원피스가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고 있었다. 뛰어 쫓아가려다, 그 자리에 우뚝 서고 말았다. 문득, 그냥 그걸로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버둥을 쳐도 움켜쥘 수 없는 게 있다는 것을 알만한 나이인 것이다. 한참 동안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멍하게 있다, 결국 나는 ‘오뎅가게’로 발걸음을 돌렸다.

 

내가 가게에 도착한 것은 꽤나 어둑해진 시각이었다. 나는 창가 구석진 곳에 홀로 앉아 말없이 소주만 들이켰고, 드문드문 사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무슨 이야기를 했던가? 저 먼 곳의 고산지대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거나, 빛바랜 시간 저 귀퉁이에서 우산 없이 비를 맞고 있던 누군가에 대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술자리라는 것이 보통 그렇듯, 그 자리에서도 꽤 많은 사람들과 시간들과 사건들이 테이블 사이를 넘나들고 있었다. 
 

여러 생각에 빠져 소주만 들이키는 사이, 시간이 한참 흘렀다. 사람들이 하나 둘씩 가게를 떠났고, 남은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바 중앙에서 국물이 끓으며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고, 대화는 가끔 이어지며 간신히 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왁자지껄 떠들던 사람들의 대화와 노래 소리가 사리진 자리에 침묵이 무겁게 들어앉았다. 술을 마셔 그렇게 느꼈는지 모르겠지만, 정말 그 자리에 다른 무엇인가가 들어와 차 있는 것 같았다. 함께 앉아 있던 사람들 각자의 지나간 시간 따위가 찾아온 것처럼 말이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마시고, 또 그러다 화장실에 다녀오는 사이,

나는 오래도록 길을 읽고 먹먹한 표정으로 헤매고 있던 게 분명하다.          

 

화장실에 다녀와 확인한 휴대폰 액정에는, 낯선 곳에서 길을 읽고 헤매는 여행자의 눈앞에 나타난 이정표처럼 발신번호 하나가 찍혀 있었다. 나는 머뭇거리다 휴대폰 버튼을 눌렀다.
잠시 뒤,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와 대답하는 내 목소리.
그녀에게 지금의 안부를 묻는 것만도 고역이었다. 그녀와 통화를 하게 되었다고 해서 그 이상 뭘 어쩌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불과 몇 년의 시간이 한 사람과 사람의 관계, 그리고 기억과 의문들마저 흐릿하게 뭉개놓았던 것이다. 때문에 오래 전 그녀가 떠난 이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바로 그 날 낮에 강남역에서 버스를 타고 종로 2가로 가던 것이 그녀였는지도 묻지 않았다. 다만 목소리를 통해 그냥 잘 지내고 있다는 것만 확인했을 뿐이다. 그것만으로도 안심이 되었다. 가끔 그녀를 떠올릴 때마다 어쩐지 그녀와 그녀 손목의 선홍색 상처가 함께 떠올라, 차라리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생각을 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던 것이다.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 내가 통화를 끝냈을 때에는 조금씩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눈시울이 붉어지듯 메마른 도시의 골목골목이 천천히 젖어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 다들 불콰한 얼굴로 앉아 국물이 말라붙은 빈 접시만 쳐다보고 있는데, 내 앞에 앉아 있던 어떤 손님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혼자 와서 소주를 마시고 있었는데, 내내 말없이 앉아 있더니 드디어 입을 연 것이다. 아주 작고 가는 목소리였다. 그런데! 그 노래는 그녀가 즐겨듣곤 했던 <Not Going Anywhere>아닌가. 손님의 목소리가 스멀스멀 빠져나와 우리를 짓누르던 공기 사이로 스며들었다. 
 

그래. 가끔은 이런 때도 있는 거다. 꿈처럼, 그리고 푸른빛이 충만한 어느 저녁의 이야기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고 서성이는 내 앞에 불현듯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들을 목격하기도 하는 거다. 나는 열병에 걸린 사람처럼 그 순간을 잊지 못해 현실에서 한 발짝 물러서서 또 한참을 지켜보기만 하며 서 있겠지. 지난 시절의 나 혹은 타자들이 어느 골목길에서 비 맞으며 서 있었듯이. 
 

나는 망연히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빗줄기가 거세졌다. 나는 창문을 열고 손님의 노래와 빗소리를 들었다. 찬바람이 실내에 물기를 옮겨놓았다. 문득 비오는 골목으로 뛰쳐나가 지나가는 아무나 붙잡고 사랑을 구걸하고 싶어졌다. 
 

그러는데, 가게 밖 노란 가로등 아래, 누군가를 기다리며 비를 맞는 어두운 그림자 하나가 우두커니 서 있는 게 보였다. 자세히 쳐다보니 그것은 오래 전 그녀가 떠난 빈자리를 견디지 못해 정처 없이 배회하던 나였다. 어쩌면 서울 한복판에서 그녀의 모습을 본 것도, 종로 한 가운데서 낙엽과 만난 것도, 그리하여 이 가게에까지 찾아와 그녀가 좋아했던 노래를 듣게 된 것 모두, 이 순간을 맞이하기 위해서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말없이 고개만 연신 끄덕이다 창밖 어둠 속에 서 있는 그를 향해 조용히 잔을 들었다. 그러자 그가 시간 저편으로 말없이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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