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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무르가 건설한 실크로드의 거점 도시

제주한라병원 2018. 3. 29. 14:07

티무르가 건설한 실크로드의 거점 도시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

    


 

 영원한 제국을 꿈꿨던 티무르의 고향, 사마르칸트는 2,500여 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중앙아시아 최고의 도시이자, 과거 실크로드의 거점으로 명성을 날렸던 오아시스다. 일명 ‘중앙아시아의 진주’라고 불릴 만큼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무역도시로서 막대한 부를 축적한 도시, 사마르칸트. 물론 동서양을 잇는 지리적 위치 때문에 아랍과 페르시아 그리고 몽골 제국 등에 핍박과 침략을 받았지만, 티무르의 후손답게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오롯이 지키며 오늘날까지 중앙아시아를 대표하는 도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

 고대 그리스에서는 ‘마라칸다라’로, 중국에서는 ‘강국(康國)’으로도 알려진 사마르칸트는, 7세기 초 우마이야 왕조의 침입을 받은 후 중국과 이라크의 바그다드를 연결하는 중계무역도시로 성장하였고, 동시에 이슬람 문화의 중심지로 번영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220년 칭기즈칸의 침입으로 실크로드 거점도시로서의 지위와 부는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도시는 거의 폐허가 되었다.

 모든 것이 일장춘몽처럼 사라졌던 사마르칸트의 옛 명성은 14세기 들어와 몽골 제국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티무르가 제국의 수도로 삼으면서 다시 한 번 찬란한 영광의 빛에 둘러싸이게 되었다. 티무르는 35여 년 동안 몽골 제국이 건설했던 땅만큼 자신의 세력을 확장했고,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제국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사마르칸트를 여행하다 보면 가장 많이 듣는 이름과 가장 많은 한 사람의 동상을 보게 되는데, 그 주인공은 티무르이다. 우리에게는 아주 악명 높은 제국의 지도자이자 절름발이 황제로 기억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그를 신만큼 존경하고 따른다.

 14세기 폐허로 된 사마르칸트를 중심으로 티무르는, 이라크 바그다드, 시리아 다마스쿠스, 이란 이스파한, 인도 델리, 터키 앙카라, 러시아 모스크바까지 엄청나게 큰 대제국을 건설했다. 몽골 제국의 칭기즈칸을 존경하고 평생 그의 길을 따르려 했던 티무르는 칭기즈칸보다 복잡한 존재였다. 그의 종족은 투르크였고, 종교는 이슬람교였으며, 그가 받드는 원칙과 법률은 몽골 제국의 제도였다. 하지만 그가 평생 무찌르고 짓밟은 대상들은 아이러니하게도 투르크족, 이슬람교도들, 몽골 제국의 칸들이었다.

 우리는 흔히 티무르를 ‘정복의 왕’, ‘살인마’ 등으로 평가한다. 그 이유는 티무르가 제국을 건설하면서 잔인무도하게 현지인을 살육했기 때문이다. 문헌적 기록에 따르면 1387년, 이란 이스파한을 점령했을 때 시민 7만 명을 몰살시켰고, 성벽 밖에 사람의 머리로 피라미드 쌓았다. 또한, 1401년에 이라크 바그다드를 짓밟을 때 무고한 시민 9만 명을 학살하였다. 그러나 티무르는 학자와 예술가들을 죽이지 않고 사마르칸트로 데려와 건축과 문화예술의 발전에 기여하게 하였다.

 전쟁터에서 획득한 부를 바탕으로 티무르 제국의 수도인 사마르칸트에 모든 것을 쏟아부은 티무르. 그 결과 5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이곳에는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시대를 달리하며 그 자리에서 보석처럼 빛나고 있다.

 우선 이 도시의 중심이자 현지인들의 삶의 휴식처인 레기스탄 광장으로 가면 푸른색 타일로 건축된 3개의 건축물이 여행자들의 눈과 마음을 매혹시킨다. 일명 ‘사마르칸트의 심장’이라고 불리는 레기스탄 광장에는 1420년에 건축된 마드레사 우루베그, 17세기 중반에 완공된 세르 도르와 틸라 카리 등 이슬람 건축문화의 정수를 보여준다. 특히 마드레서 우루베그는 중세 시대 이슬람 최고의 종교 교육 기간이었다.

 한 걸음 더 티무르 시대로 들어가면 티무르의 장대한 꿈과 희망 그리고 그의 아내인 비비하눔의 가슴 시린 이야기가 스며있는 모스크와 마주하게 된다. 사마르칸트를 방문한 여행자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방문하는 비비하눔 모스크는 이 도시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로, 가로 167m, 세로 109m의 사각형 회랑에 50m 높이의 거대한 미나렛과 푸른색 타일로 장식된 돔이 인상적인 건축물이다.

 1390년 티무르는 이슬람 세계에서 가장 웅장하고 화려한 사원을 짓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제국 각지에서 차출한 200명의 기술자와 500명의 노동자, 코끼리 95마리 등을 동원해 1404년에 완공하였다. 하지만 전쟁터로만 나돌 던 티무르는 이 모스크 건축에 신경을 제대로 쓰지 못했고, 이것을 완성한 사람은 그의 아내, 비비하눔이다.

 티무르의 9명의 아내 중에서 몽골 출신의 절색 가인인 비비하눔. 그녀는 티무르의 사랑과 총애를 받았는데, 티무르가 잠시 인도 원정을 떠나자 그가 돌아오기 전에 이 건축물을 완공하고 싶어 페르시아 출신의 건축가에게 재촉하였다. 그런데 건축가는 비비하눔을 사랑해 자신에게 키스해 주면 빨리 완공시키겠다고 했다. 그녀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거절했지만, 건축가는 비비하눔의 말을 듣지 않고 계속해서 사랑의 메시지를 보냈다. 시간의 편은 건축가에게 있었는데, 그녀는 하는 수 없이 그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너무도 건축물을 빨리 짓고 싶은 마음에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던 그녀. 마침내 인도 원정에서 돌아온 티무르는 건축가와 비비하눔간에 내막을 듣고 가차 없이 건축가를 사형을 시켰다. 그리고 비비하눔에게는 부끄러움을 일깨워주려고 얼굴을 가리고 다니게 했다. 이때부터 우즈베크의 여인들은 얼굴을 가리는 히잡을 쓰고 다녔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허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비비하눔의 욕심으로 인해 완성된 모스크는 너무나 아름답고 환상적인 이슬람의 분위기를 연출한다.

 비비하눔의 전설만큼이나 또 다른 이야기가 스며 있는 곳이 하나 있는데, 그곳이 바로 티무르의 영혼이 안치된 ‘구르 아미르’이다. 정교한 문양과 푸른 돔이 인상적인 구르 아미르는 티무르뿐 아니라 그의 아들과 손자들까지 묻혀 있는 가족묘이다. 일단 안으로 들어서면 1층에 티무르를 비롯해 여러 개의 관이 있는데 실제의 관은 지하에 안치돼 있고, 일반인의 접근을 금지하고 있다.

 검은 돌로 된 티무르의 관에는 “내가 이 무덤에서 나올 때, 가장 커다란 재앙이 일어날 것이다”라는 문장이 새겨져 있어 아무도 관을 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1941년 6월 19일 구소련에 의해 처음으로 관이 개봉되었고, 전설처럼 내려오던 티무르의 ‘절름발이’설이 맞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티무르의 관이 열린 3일 후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는 세계 2차 대전이 일어났다. 티무르의 예언대로 큰 재앙이 소련에 찾아왔고, 그 후로 관을 열수 없도록 납으로 용접해 두 번 다시 열리지 않게 하였다. 이처럼 사마르칸트에 머무르는 동안 전설과 신화 같은 이야기들 그리고 눈으로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푸른색의 건축물들을 마주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