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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선율과 중세의 멋스러움이 묻어나

제주한라병원 2018. 3. 2. 10:35

아름다운 선율과 중세의 멋스러움이 묻어나

 

헝가리 소프론

 

 

 땅거미가 서서히 밀려오자 말끔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푀 테르 광장에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광장에 마련된 무대 앞은 아홉 살 난 한 소년의 연주를 듣기 위해 모인 청중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소년의 등장으로 사람들의 웅성거림은 멈췄고, 연주가 시작되자 청중들은 아름다운 피아노의 선율에 귀를 기울였다. 흑백의 건반 위에서 자유롭게 춤추는 어린아이의 손끝은 포르테와 아다지오를 넘나들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하모니를 빚어냈다.


 이날 펼쳐진 한 천재 소년의 초연은 서양 음악사의 한 획을 긋는 음악가의 탄생을 예고했다.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소년은 바로 쇼팽과 쌍벽을 이룬 헝가리 출신의 풍운아, 리스트 프란츠이다. 오늘날 교향시의 아버지로 불릴 만큼 뛰어난 음악성을 자랑한 리스트는 소프론 근교인 라이딩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헝가리를 대표하는 대음악가로 명성을 날렸다. 특히 소프론은 열 살 소년 리스트가 대중 앞에서 공식적으로 초연을 했던 곳이자 서른 살 때쯤 2년간 머물며 음악적 영감을 키운 곳으로 그의 팬들에게는 의미 있는 도시이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국경이 맞닿은 곳에 위치한 소프론은 오스트리아 알프스산맥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다. 여름철에도 멀리 알프스의 만년설이 보일 만큼 빼어난 자연경관이 사람들의 마음을 풍요롭게 한다. 드넓은 대지를 차지하고 있는 파릇파릇한 포도 잎사귀들은 이곳이 와인의 산지임을 말해준다.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 기차로 1시간 정도 거리에 있는 소프론은 헝가리라는 느낌보다 오스트리아의 분위기가 더 강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헝가리인임을 강조하고 싶어 하는 분위기다. 실제로 소프론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시민들의 투표를 통해 오스트리아가 아닌 헝가리로 남길 결정했다고 한다. 소프론을 비롯한 몇 개의 작은 도시들은 오스트리아에 병합될 때 소프론은 헝가리를 택한 것이다. 그래서 리스트 프란츠도 오스트리아인이 아닌 헝가리아인으로 남았고,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의 국제공항에 그의 이름이 붙게 되었다.


 리스트의 열정과 삶이 스며 있는 소프론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도시는 아니지만, 유럽에서는 리스트를 떠올릴 때마다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곳이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많은 청중들 앞에서 멋진 피아노 솜씨를 뽐낸 리스트는 "소프론은 나의 음악적 감성을 키워 준 도시"라고 설명했다.


 독일에서는 외덴부르크라 불리는 소프론은 켈트인에 의해 마을이 시작되었고, 로마 시대 때는 스카라반티아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제1차 세계대전 후에는 부르겐란트주의 일부로 오스트리아령이 되었다가, 1921년 헝가리에 귀속되었다.


 도시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여행하는 데 하루가 소요될 만큼 소프론은 중세의 보물이 많은 곳이다. 여행의 시작은 구시가지에서 시작되는데, 중앙역에서 도보로 10여 분 남짓 걸린다. 구시가지에 들어서면 빛바랜 성곽이 여행자를 맡는다. 터키와 몽골의 침략은 간신히 피했지만, 세계대전을 피할 수 없었기에 마을을 보호하던 성곽이 많이 부서졌다.


 소프론이 헝가리에 귀속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충성의 문`에 들어서면 중앙 광장과 시청사가 눈에 들어온다. 광장 중심에 발을 디디면 소년 리스트의 멋진 연주를 하던 모습이 상상의 날개로 펼쳐진다. 중세의 멋스러움이 묻어나는 도로의 바닥에는 소프론의 역사가 녹아 있고, 세월에 의해 낡은 건물에는 중후함이 느껴진다. 중세시대 때 지어진 건축물들이 모두 거기서 거기지만 리스트의 음악적 열정이 남아 있는 소프론의 건축물은 그의 음악처럼 아름답게 다가온다. 수많은 청중 앞에서 멋진 연주를 선보였던 리스트를 상상하는 동안 마음은 그의 곁으로 달려가고 있다. 과연 어디서 그가 연주했던 것일까? 낯선 도시를 두리번거리는 동안 청중들의 환호와 박수갈채가 시공을 초월해 귓가에 쩌렁쩌렁 울린다.


 좀 더 리스트의 흔적을 느끼고 싶다면 구시가지 중심에 있는 스토르노 저택으로 가야 한다. 이곳은 리스트가 2년간 머물렀고, 15세기 헝가리 왕국을 지배했던 마챠시 왕이 소프론을 방문할 때마다 이 저택에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다. 그만큼 스토르노 저택은 소프론 여행의 중심이자 리스트의 향수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건물구조는 3층으로 1층은 레스토랑, 2~3층은 스토르노가 평생 모은 컬렉션들이 잘 정리되어 있다. 2층 전시실로 올라가면 명화에서부터 장신구, 가구, 의복 등 다양한 컬렉션이 여행자의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한다. 여유롭게 스토르노의 컬렉션을 감상하고 있노라면 2층 한구석을 차지한 위대한 음악가 리스트의 유품과 마주하게 된다.


 구시가지 인포메이션 센터의 입구에 서 있는 리스트의 흉상과 ‘리스트’라는 거리 이름에서 그와 첫인사를 나눴지만, 실질적인 만남은 그의 초상화와 공연 팸플릿 그리고 악보 등이 전시된 스토르노 저택의 2층에서 이뤄진다. 그의 전시물 앞에 서자 그의 음악이 낡은 스피커를 통해 들려온다. 그의 유품을 감상하는데 3분도 채 걸리지 않지만, 전시물 앞에서 걸음이 쉽게 옮겨지지 못한다. 그의 음악적 열정과 사랑이 계속해서 우리의 발길을 묶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