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앗간 집 아들에서 빛의 마술사가 된 ‘렘브란트’
네덜란드 라이덴(Leiden) |
빈센트 반 고흐와 함께 가장 인기 있는 화가 중 한 명인 렘브란트는 우리에게 아주 친숙한 화가다. 밝고 어두운 명암 속에 비춰진 한 예술가의 자화상은 우리에게 강인한 메시지를 전해준다. 100여 점이 넘는 자화상 중에서 1628년에 그린 스물두 살의 렘브란트 자화상은 그의 명성에 걸맞은 작품이다. 등 뒤에서 쏟아지는 광선 때문에 얼굴은 어둡고 희미하다. 하지만 사람들의 눈은 청년 렘브란트를 찾기 위해 숨을 죽이고 천천히 그의 얼굴을 응시한다. 무언가를 옆으로 흘겨보는 듯한 그의 눈매와 두루뭉술한 코 그리고 두툼한 입술 등의 실루엣에서 엿볼 수 있는 은은한 모습에 사람들은 매료된다.
많은 예술가들이 그렇듯이 렘브란트 또한 자신이 태어난 곳과 전성기를 보낸 곳이 다르다. 그의 고향은 라이덴(Leiden)이라고 하는 전원도시이고, 화가로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곳은 네덜란드의 수도 암스테르담이다. 다만 렘브란트는 다른 예술가들과 달리 정체성이 확고하게 성립된 스물일곱에 고향을 떠났다는 것이 조금 다르다. 그래서 우리는 라이덴을 통해 한 천재의 작품 속에 어떻게 이곳이 반영되었는지를 알게 되면 조금 더 가까이에서 그를 만날 수 있다.
한 폭의 풍경화가 그려지는 라이덴은 렘브란트가 1606년 7월 15일에 태어난 고향이다. 그는 라이덴에서 방앗간 사업을 하던 아버지 덕분에 어린 시절부터 라틴어와 그림 배울 수 있었고, 아버지의 후원으로 1624년부터 자신만의 아틀리에를 열었다. 1632년까지 독학으로 친척, 이웃노인, 성서에서 소재를 얻어 꾸준히 그림을 그렸다. 그 결과 20대 중반을 넘긴 렘브란트는 라이덴에서 유명해지자 본격적으로 화가로서 명성을 얻기 위해 고향을 떠나 암스테르담으로 이주를 하여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우리에게 조금 생소한 이름이긴 하지만 17세기에 라이덴은 네덜란드에서 암스테르담 다음으로 큰 도시였다. 렘브란트가 태어나기 전만해도 도시 인구가 5만여 명이 될 만큼 라이덴은 유럽에서 꽤 알려졌다. 청년 렘브란트가 다녔던 레이던 대학(1575년 건립)은 유럽에서 유서 깊은 곳이자 네덜란드 최초의 대학으로서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지금은 그때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지만 당시의 책을 보면 라이덴 대학의 명성이 대단했음을 간접적으로 말해준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빈센트 반 고흐의 할아버지가 이 대학을 나와 개신교 목사로서 명성을 날렸다.
중세 시대 때부터 운하가 발달한 라이덴은 암스테르담과 함께 상공업 도시로 번성하며 네덜란드의 문화와 예술을 대표하는 학문 도시로 발전했다. 로마 시대 때는 라틴어로 ‘로마인의 야영지’라는 뜻의 ‘루그두눔 바타보룸(Lugdunum Batavorum)’으로 불리었으며, 9세기 때부터 본격적으로 도시가 발달했다. 무엇보다 크고 작은 운하들이 거미줄처럼 얽히고설켜 있고, 강을 따라 르네상스식 건축물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어서 암스테르담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긴다. 중세 시대 때는 모직 공업이 발달했으며, 그 후로는 네덜란드의 인쇄와 출판 중심지로 각광받는 도시였다. 지금은 운하 도시 또는 렘브란트의 고향 정도로만 기억되지만 이곳은 한 천재에게 예술적 영혼을 일깨워준 소중한 곳이다.
라이덴 중앙역에서 구시가지로 10여 분 정도만 걸으면 렘브란트 작품에 등장한 풍차들이 가벼운 인사를 건넨다. 미술평론가들은 이 도시의 풍차들이 바로 렘브란트가 빛을 이용한 그림의 원천이라고 평가한다. 풍차가 천천히 돌아갈 때 큰 날개에 의해 빛이 가려지면 어두운 그림자가 생기고, 날개가 지나가면 밝은 태양빛이 쏟아지는 현상을 어릴 적부터 눈으로 체험한 것이 빛을 이용하게 된 그의 화풍이라고 설명한다.
빛과 그림자에 대한 명암을 이용한 기법,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를 잘 이용해 빛의 마술사가 된 렘브란트. 그는 명암의 대비 효과를 위해 키아로스쿠로를 사용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빛의 세계를 구현하였다. 3차원적인 물체나 사람을 묘사할 때 입체적인 느낌을 주기 위해 명암의 효과를 극대화시켜 빛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이처럼 자신의 집에서 운영하던 풍차는 그를 세계적인 화가로 만드는데 일조를 한 셈이다. 렘브란트에게 풍차는 그림 인생의 원천이었기 때문에 그의 그림에도 자주 등장한다. 이제는 더 이상 돌아가지 않는 풍차지만 그의 그림 속에서는 오늘도 변함없이 돌아간다.
렘브란트의 예술적 영혼을 좀 더 만나기 위해 스틴 거리로 들어서면 갑자기 집채만 한 명작들이 야외 갤러리를 연상케 한다. 거리와 건물 외벽, 신호등, 골목길 등에 붙여진 그의 그림은 도시 어딜 가든 우리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 도시에 걸린 대부분의 작품들은 그가 암스테르담으로 떠나기 전에 그려진 것들이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그를 이웃집 아저씨처럼 좋아하고, 그에 대한 자긍심도 높다.
도처에 전시된 그림은 달리는 자동차와 운하를 가로지르는 배에서도 볼 수 있고, 아름다운 노천카페에서 차를 마시면서도 감상할 수 있다. 또한 도로 간판이나 안내표지에서도 그의 자화상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그중에서도 구시가지 중심지인 보테르 마르크트 거리에 서면 저 멀리서 ‘작업실의 화가(1628년)’라는 작품이 눈에 들어온다. 건물 외벽을 완전히 덮을 만큼 굉장히 큰 이 그림 속에서 우리는 렘브란트를 만난다. 캔버스의 2/3를 차지하는 이젤과 캔버스와 자연 채광을 흠뻑 받고 있는 방안 그리고 한 귀퉁이에서 캔버스를 바라보고 있는 렘브란트 자화상에서 색다른 느낌을 받는다. 또한 골목길에는 큰 팔레트가 건물 벽면에 걸려 있고, 그가 그린 자화상과 다양한 작품들이 건물과 사람들 틈바구니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듯한 인상을 준다. 동서남북 어딜 가든 그의 작품들이 도시 곳곳에 걸려 있어 마음껏 그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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