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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TV․인터넷 없는 생활을 즐겨보세요

제주한라병원 2014. 1. 29. 09:11

가끔은 TV․인터넷 없는 생활을 즐겨보세요
 
해병대 수병 시절 전방에서 막사 한 군데를 지키며 혼자 생활한 적이 있습니다. 먹을 것은 일주일에 한차례 보급 트럭이 찾아와 배급했고 개인화기는 M16 소총과 탄창 5개, 대검, 수류탄 2개, 조명탄이었습니다. 그리고 집에서 가져온 라디오가 전부였습니다. 요즘 군 생활과 비교하면 거짓말 같겠지만 44년 전 일입니다.


외롭고 답답해 노래부르기와 라디오 듣기로 4개월을 지냈습니다. 목청껏 부른 노래는 중고 시절 배운 가곡이나 명곡, 사회생활하며 익힌 가요들이었고 라디오에서 배운 각종 가요와 명곡들로 다양했죠. 별도로 노래책도 없었는데 가사를 전부 외워서 부른 노래가 수백 곡은 됐을 것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많은 노래 가사를 어떻게 외웠는지 모르겠습니다. 요즘은 노래방에서 노래책이나 모니터에 뜨는 가사가 없으면 단 한곡도 부르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은 전화번호도 제대로 외우는 게 서너 개 정도일 것입니다. 가지고 다니는 휴대폰에 번호가 저장돼 있어 굳이 번호를 기억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니까요.


30년 전 노래방 기기가 일본에서 건너와 부산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는데 한국은 노래방 기기를 일본 것보다 개발해 지금의 노래방 기기가 탄생했습니다. 당시 미국 LA 올림픽 취재를 갔다가 교통사고로 척수손상을 입고 하반신이 마비돼 휠체어를 타는 생활을 하게 돼 좌절감이 심했으나 신문사 동료들과 함께 멀티비전이 설치된 카페에 가서 노래방 기기 화면을 보며 실컷 노래 부르며 차츰 세상 사람들과 다시 스스럼없이 만나게 돼 노래방은 저의 재활에 큰 도움이 됐죠. 하지만 그때부터 노래를 부르려면 가사는 잊어버리고 기기 화면만 의존하게 됐습니다.


20년 전부터는 휴대폰을 사용하면서 장애인들의 생활이 편리하게 됐고 10년 전부터는 내비게이션이 나와 운전할 때 길 찾기가 편리해졌으나 이제는 내비게이션이 없으면 먼 곳을 찾아가는데 애를 먹는 세상이 됐습니다. 내비게이션도 요즘은 스마트폰으로 대체할 수 있어 사양품목이 됐죠.


KBS 2TV에서 2년 전 방영한 리얼체험 프로젝트 <인간의 조건>이란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김준현, 김준호, 양상국, 허경환, 박성호, 정태호 등 <개그콘서트> 개그맨 6명이 일주일간 합숙하면서 ‘어떤 생활이 펼쳐질지 모른 채’ 모여 살아가는 프로그램입니다. 그들은 우선 집에 집전화를 설치하기로 하지요. 그리고 좋아하던 TV도 인터넷도, 휴대전화도 없으니 금단증상을 겪으며 ‘뭘 해야 하나?’하며 지루해서 죽~더군요. 처음에는 불편하고, 고립감을 느끼지만, 점점 눈앞에 있는 현실과 사람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개그맨 6명은 어떤 변화를 보였을까요? 5가지 효과는….


1. 단 한 사람의 소중한 연락처를 찾아낸다
첫날, 휴대전화가 없는 이들은 소중한 사람에게 공중전화로 전화를 하죠. 수백 개의 연락처. 수백 명의 사람들. 그것이 끊어져버렸을 때 느끼는 소외감. 그러나 덕분에 수백 개의 연락처 중 단 한 명의 의미 있는 전화번호를 본능적으로 찾아내기도 합니다.


2. 사람을 본다, 사람이 반갑다
김준현은 늘 휴대전화만 보던 눈이 이제야 사람을 보게 되죠. TV, 휴대전화, 인터넷을 생활에서 빼 버리니, 그제야 사람이 보이고, 그제야 사람이 그리워졌지요. 허경환이 탔던 택시 아저씨는 이런 이야기를 하죠. “예전에 연인들이 알콩달콩 대화를 많이 했는데 요즘에는 그런 소리를 못 들어요. 서로 자기 휴대전화만 보느라고.”


3. 함께할 것을 찾는다   
아무것도 할 것이 없으니, 무료해진 이들은, 곧 다른 방법으로 함께할 것을 찾게 되지요. 휴대전화 대신 김준현이 기타를 치며 함께 노래하고 TV 대신 친구를 만나고, 새로운 취미를 발견하고, 홍대거리 할로윈파티도 다녀오고.


4. 스스로가 삶의 주체가 된다
여섯 명의 개그맨들, 시간이 흐를수록 휴대전화, 인터넷, TV가 그리워지지만, 조금 더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삶을 만들어가기 시작하지요. 한국시리즈가 보고 싶다면 야구장으로 가고, 영화가 보고 싶다면 영화관으로…. 하루의 할 일을 수첩에 적어서 정리하고 조금은 느리고 번거롭지만 생각부터 행동까지 모든 과정의 주체가 스스로임을 발견합니다. 체험 4일째 되는 날, 용산상가에서 아날로그 라디오를 사왔던 김준현. 그리고 5일째에는 편의점에서 일회용 카메라를 사지요. 그리고 친구들을 찍지요.


5. 불편했던 관계가 수면 위로 드러난다
휴대전화, 인터넷, TV 없이, 6명의 개그맨이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꼭 좋은 결과만 만들지는 않지요. 미묘한 갈등이 있었던 박성호와 김준호. 어디로도 피해버릴 수 없는 이들에게 그 갈등은 곧 수면 위로 드러나지요. 하지만 그것이 꼭 나쁜 결과만은 아니었지요. 문제는 드러나야 풀 수 있는 법이니. 10여년 만에 처음으로 서로의 진심어린 마음을 아는 자리가 마련된다고 하네요.


여섯 명의 개그맨들은 이번 체험을 통해 변화된 자신들의 모습과 미처 알지 못했던 서로의 모습을 발견하면서 놀랐다는 소감을 전했다고 하는데요. 기계를 내려놓으니 사람이 보이고, 자동차에서 내리자 풍경이 보인다. 함께 있을 때는 휴대전화보다 서로를 바라보는 데 익숙해져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을 깨달았죠. <인간의 조건>은 다큐 프로그램으로는 이례적으로 동 시간대 시청률 1위를 기록했다고 합니다.


일주일에 반나절만이라도 스마트폰과 이별하면 어떨까요. 함께 있는 동료나 가족과 함께라면 더욱 좋고요. 돌이켜보면 현대문명의 이기(利器)들이 우리 생활을 윤택하고 편리하게는 만들었지만, 그만큼 우리를 바보로 만들고 있는 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어느 분은 인터넷을 안 하며 며칠을 보낸 후 ‘시간이 내 생각보다 많고 더디게 흘러가며 눈으로 보는 세상보다 귀로 듣는 세상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알려주었고, TV없이도 얼마든지 재미있는 삶이 가능하다는걸 알았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