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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 식민도시에서 '알베르 까뮈'를 만나다

제주한라병원 2013. 12. 30. 16:09

로마제국 식민도시에서 '알베르 까뮈'를 만나다

-알제리 제밀라-

 

 

까뮈의 말처럼 해가 지고나면 제밀라에는 거센 바람이 휘몰아친다.

 

지중해 북부를 장악한 로마제국은 콘스탄티누스대제가 수도를 콘스탄티노플(現이스탄불)로 천도한 후 북아프리카에서 세력이 점차 쇠퇴하게 이르렀고, 한 개의 하늘 아래 두 개의 로마 제국의 분열이 서서히 시작되었다. 이른바 서로마제국과 동로마제국의 분열이 시작될 무렵 분열 직전의 제국의 황제였던 테오도시우스는 장남인 17세의 아르카티우스에게 동로마제국을, 6세의 둘째 아들 호노리우스에겐 서로마제국을 맡기고 떠난다. 이때부터 로마는 두 개의 제국으로 분열되었고, 서로마제국은 서쪽으로는 스페인과 아프리카 북부, 북쪽으로는 갈리아와 브리타니아, 게르마니아, 그리고 본국 이탈리아와 로마를 지배하였고, 동로마제국은 콘스탄티노폴리스(콘스탄티누스의 도시)를 중심으로 이집트, 중동(레바논, 시리아, 요르단, 이스라엘),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등을 지배하였다.


알제리, 튀니지, 리비아, 이집트 등 지중해를 끼고 있던 북아프리카 지역은 서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근근이 로마 제국의 식민지로 버텨왔지만 게르만인의 한 갈래인 반달족에게 북아프리카는 처참하게 유린당했다.


북아프리카에 있는 수많은 로마 유적들 중에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는 유적지가 바로 알제리에 있는 제밀라 유적이다. 물론 이 지역 출신이자 그 유명한 알베르 까뮈의 ‘제밀라의 바람’이라는 에세이를 통해 이 도시가 세상 밖으로 소개된 적이 있지만 아직까지 제밀라는 지중해 바람 속에 꽁꽁 숨어 있는 아스라한 로마제국의 식민도시이다.
반달족에게 무참하게 부서진 로마유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제밀라는 트리야누스 황제가 제3군단 아우구스투스의 퇴역 군인을 위해 건설한 식민 도시이다. 이곳은 농산물 시장으로 부유해졌고, 세베루스 왕조 시대에 번영을 누렸다. 원래 로마 군 진영의 설계를 본 떠 사각형 모양으로 도시를 건설했다.

 

 

외부에서 보면 전혀 보이지 않을 만큼 숲 속 깊이 자리한 제밀라 유적.

B.C111년 현재의 알제리를 지배하던 누미디아 왕국의 유구르타 왕은 로마와 벌인 전쟁에서 패하고, 로마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콘스탄티누스의 침입으로 인해 도시에 기독교 공동체를 위한 교회와 예배당이 추가 되었다.


제밀라 바람에 까뮈를 만나다
젊은 시절 누구나 한 번 쯤은 알베르 까뮈의 에세이집을 읽어봤을 것이다. 북아프리카 알제리 콘스탄틴에서 태어난 그는 귀머거리였던 어머니와 조모 밑에서 자랐다. 가난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학문적 열정은 어렸을 때부터 남달랐고, 프랑스 식민지였던 조국은 그의 문학성을 한 층 성숙시켜주는데 일조를 했다. 도서관에서 우연하게 만난 그의 에세이 ‘제밀라의 바람’과 그의 고향 콘스탄틴은 한국에서 아주 머나 먼 땅으로 떠나는데 충분한 자극제가 되었다. "새들이 우는 소리, 세 구멍짜리 플루트의 고즈넉한 소리, 염소들이 발 구르는 소리, 하늘에서 나는 소리, 그 많은 소리가 그곳의 침묵과 황폐한 분위기를 이루고 있었다. 따라 가는 길마다 집들의 폐허 사이에 난 소로들이며, 광택 나는 기둥과 돌로 포장된 대로들이며, 개선문과 언덕에 선 신전 사이의 거대한 광장이며, 모두가 끝없는 하늘에 벌여 놓은 카드처럼 도시는 사면팔방에서 경계 짓는 협곡들과 통하고 있었다. " 이 글은 1957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알베르 까뮈가 쓴 ‘제밀라의 바람’이라는 에세이의 한 구절이다. 콘스탄틴에서 덜컹거리는 버스를 타고 보이지 않는 바람과 누렇게 농익은 밀밭을 달리면 어느새 고대 로마도시 제밀라를 만나게 된다. 굽이치는 협곡 사이에 누르스름하게 머리를 내민 이곳은 까뮈가 한 줌의 바람이 되어 젊은 시절 많은 시간을 보냈던 곳이다. 물론 지금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고대 도시가 말끔하게 단장되었지만, 까뮈가 이곳을 찾았을 땐 황폐한 분위기가 감도는 도시였다.

 

 

로마제국 시절 식량지로 유명했던 제밀라는 주변에 넓은 밀밭이 인상적이다.

콘스탄틴에서 서쪽으로 150㎞ 떨어진 이곳에서 까뮈는 예술적인 영감을 얻어 주옥같은 글을 남겼다. 실제로 이곳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낯선 이방인을 맞는 것이 바로 바람이다. 해발 950m에 위치한 이유 때문인지 바람은 도시를 향해 끊임없이 불어온다. 로마인들이 이렇게 높은 지대에 도시를 건설한 이유와 까뮈에 대한 향수를 느끼기 위해 온종일 바람이 되어 이곳을 헤맨다. 1세기 말에 번성하기 시작한 제밀라는 로마의 다른 식민도시와 마찬가지로 로마건축에 필요한 모든 요소들을 갖추고 있다. 동로마의 콘스탄티누스의 침입으로 인해 도시에 기독교 공동체를 위한 교회와 예배당이 추가된 것이 인상적이다. 특히 제밀라 유적지 주변은 밀레의 풍경화가 연상될 만큼 아름다운 밀밭이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곳에서 재배된 밀은 지중해를 통해 이탈리아 로마로 들어갔을 정도였다. 그러니 제밀라는 로마 군대의 식량기지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원래 도시 이름은 ‘아름다운 것’을 뜻하는 아랍어 제밀라이고, 라틴어로 ‘퀴쿨(Cuicul)’이었는데 로마제국이 쇠퇴할 때 반달족과 7세기 경 아랍인들의 침략 때 도시가 파괴되고 이름도 현재의 ‘제밀라’로 바뀌었다.


바람이 일기 시작하면 아주 거세게 몰아치는 제밀라. 이런 바람을 좋아했던 까뮈는 이른 아침부터 해질녘까지 이곳에 머물며 로마가 남긴 흔적을 감상하면서 자신의 문학적 감성과 철학적 이론을 키우려고 노력했다. 그는 처음에 이곳을 방문했을 때의 인상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제밀라에 가려면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곳은 사람이 길을 멈추고 또 거쳐 가는 도시가 아니다. 어디로도 길이 나 있지 않았고 아무데도 트이지 않았다. 사람이 들렀다가는 다시 돌아와야 되는 그런 곳이다." 그의 말처럼 제밀라는 거쳐 가는 도시도 아니고 왔던 길을 되돌아와야 다시 외부 세계로 나갈 수 있을 만큼 산 속에 있는 작은 요새와 같은 철옹성이다. 심지어 바람도 이곳에 들어오면 소용돌이가 될 정도로 협곡 사이에 똬리를 튼 모습은 너무나 환상적이다. 까뮈의 글이 아니라 눈으로 직접 제밀라를 보게 된다면 모든 사람들이 탄성을 자아내게 할 만큼 독특하다. 거의 정상에서 능선을 따라 내려가듯이 도시는 펼쳐져 있다.

 

반달족의 침입으로 많은 유적들이 부서지고 앙상하게 기둥만 남아 있는 제밀라.

까뮈가 태어나고 자란 그의 고향, 콘스탄틴의 전경

부서진 벽과 녹슨 철 등이 할머니를 쓸쓸하게 만들고, 이들은 제밀라를 더욱 슬프고 애달프게 만든다.


산마루에 위치한 제밀라 입구에서 비탈진 언덕을 따라 천천히 내려오면서 제밀라 여행은 시작된다. 알제리의 숨겨 놓은 보물인 제밀라는 세계문화유산답게 인류의 소중한 자산으로 평가받는다. 도시는 2~3세기에 군대에서 퇴직한 사람들에 의해 건축되었다. 유적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로마황제의 아들이 아버지에게 헌정한 셉티미우스 신전과 3천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원형극장이다. 리비아의 렙티스 마그나에 비하면 초라하지만 알제리에서 가장 큰 규모다. 그 이외에도 로마시대에 지어진 신전, 포럼, 집회와 재판에 사용됐던 바실리카, 승리를 상징하는 개선문, 목욕탕, 세례당, 시장 등 로마도시가 가져야 할 모든 건물들이 바람과 더불어 늠름하게 서 있다. 다소 황량하고 쓸쓸한 분위기가 로마 돌덩이 위에 머물지만 제밀라의 영원한 친구인 산과 들판 그리고 하늘은 이 도시를 더욱 아름답게 한다. 아마 우리가 보고 느낀 제밀라의 영화로움과 신비로움 그 이외 모든 감성들을 이곳을 찾았던 까뮈도 느꼈을 것이다. 시대는 틀리지만 똑같은 공간에서 느낀 인간의 원초적인 감성은 그와 별반 차이가 없을 것이다. 주변의 산과 들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좋아했던 까뮈처럼 우리도 제밀라에 머무는 동안 바람 한 줌을 좋아하게 될 것이다. 하늘이 붉은 석양을 토해낼 즈음 바람은 이방인들을 내려가라고 어깨를 떠민다. 해가 진 이후에는 더 이상 이곳에 머물지 못하도록 바람은 점점 더 거세게 몰아친다. 그러나 제밀라의 바람은 매섭고 차가운 느낌보다는 바람에 묻어있는 연민과 따스한 감성이 여행자의 발걸음을 한결 가볍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