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말을 사용합시다
박근혜 대통령이 올해 들어 남북관계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신뢰 프로세스’라는 말을 자주 씁니다. 기자 생활을 40여년 한 저도 처음 들었을 때 “무슨 뜻이지?”라며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신뢰라는 단어는 믿음이라는 말이고, 프로세스는 영어의 ‘Process’로 과정, 절차, 변화 진행, 경과, 방법, 조치, 공정, 작용으로 알고 있습니다. 조합하면 신뢰 과정?-신뢰 절차?-신뢰 진행? 영어도 아니고 한글도 아니고 억지스럽습니다. ‘건축 프로세스’나 ‘요리 프로세스’는 그래도 어울립니다. 여기의 ‘프로세스’는 아무런 문제없이 ‘과정’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박 대통령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북한이 믿음을 주는 신뢰성을 지속적으로 보여주어야 한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그러면 쉬운 우리말로 ‘남북한간의 신뢰성이 이어져야 한다’고 하면 국민들은 알아듣기 쉬울 것입니다. ‘신뢰 구축 과정’이라는 말도 괜찮을 듯 싶습니다.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한반도의 신뢰 구축’에 총력을 기울여야 합니다”라고 말하면 이해하기 좋을 듯 합니다.
언론사도 꼭 영어로 해야 됩니까? 부득이 영어로 말할때는 영어 해석이 따랐으면 좋겠습니다.
얼마 전 학교 선생님 출신으로 교육개혁운동을 하던 서울시 김형태 의원은 14년 전 이명박 시장이 내건 ‘Hi Seoul’이란 영어 대신 쉬운 우리말글로 ‘희망 서울’이나 ‘함께 만드는 서울, 함께 누리는 서울’이란 구호로 바꾸자고 박원순 시장에게 시정 질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김 의원은 서울시 알림 글과 공문서에 “‘시민 감동을 위한 CS테마여행’, ‘클린재정’, ‘e-Poll 설문조사’, ‘시민모니터’, ‘천만상상 오아시스’, ‘온(溫)라인 시장실’, ‘라이브 원순’, ‘매니페스토’, ‘하이서울뉴스’, ‘FunFun 서울’, ‘서울라이프’, ‘스페셜기획’, ‘똑똑! 건강체크’, ‘피플속으로’, ‘이색서울人’, ‘新행정의달인’, ‘포토에세이’, ‘on세상e서울’, ‘카툰극장’, ‘희망플러스 통장’, ‘하이서울 페스티발’, ‘서울형 데이케어 센터’, ‘서울시복지패널’ 등 무슨 뜻인지 모를 외래어가 가득한 것을 지적하면서 쉬운 우리 말글로 쓰자고 서울시장에게 질의한 것입니다.
14년 전 서울시가 ‘Hi Seoul’이란 영문 구호를 내세우니 전국 지방자치단체들이 모두 서울시를 따라서 부산이 다이나믹 부산, 수원이 해피 수원, 대구가 웰빙 대구 등 영문 구호를 만들어 알리느라고 많은 세금을 들였습니다. 그러나 요즘엔 강원도 정선이 ‘아리 아리 정선’으로 쓰는 등 우리 말글로 구호를 바꾸려는 바람이 일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리말로 바꾸기 애매한 영어도 물론 있지만 ‘로드맵(목표와 추진 일정)’ ‘로컬 푸드(현지생산식품)’ ‘렌트 푸어(전세 빈곤층, 셋집 빈곤층)’ ‘쉐어 하우스(주택공공임대)’ ‘모멘텀(동력 흐름)’ ‘First mover(선행자)’ ‘니즈(요구)’ ‘리스크(위험요인)’ ‘거버넌스(공공경영)’ 같이 대체 가능한 말도 수두룩합니다.
그럼 왜 공공기관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영어 정책이나 표현을 즐기는 걸까요. 아직까지 대놓고 이유를 밝히지는 않지만 과시욕구와 타 부처와의 차별화, 국제화에 대한 강박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의학용어 중에 ‘좌창’과 ‘절창’ ‘와우’ ‘단골’이란 게 있습니다. 좌창은 여드름을, 절창은 베인 상처를, 와우는 달팽이, 단골은 짧은뼈를 의미하는 단어로 각각 쓰이는데 이렇게 어려운 의학용어로 설명한다면 제대로 알아듣는 환자가 얼마나 될까요?
서울대의대 피부과 은희철 교수와 가톨릭의대 해부학교실 정인혁 교수, 이화여대 인문학부(언어학) 송영빈 교수는 이처럼 어려운 의학 전문용어를 이해하기 쉽고 아름다운 우리말로 바꾸는 방법을 제시한 ‘아름다운 우리말 의학 전문용어 만들기’라는 책을 발간했습니다.
의사와 언어학자가 펴낸 이 책에 대해 은 교수는 “피부과 진료실에서 환자에게 진료 결과를 설명하면서 ‘보통비늘증’이라는 쉬운 우리말을 두고 ‘이치티오시스 벌가리스’나 ‘심상성 어린선’이라고 말한다면 환자와의 소통은 어려울 것”이라며 “전문용어 역시 시대적 요구에 맞게 모두가 소통 가능한 용어로 변화돼야만 가치가 있다”고 말합니다.
사후피임약이나 응급피임약이라는 용어도 ‘사후피임제’, ‘응급피임제’로 바꿔 써야 한다는 주장도 했습니다. 특정 상황을 제거시키는 ‘-약’이란 말 대신 상황을 촉진시키는 ‘-제’가 적당하다고 설명합니다. 의학 분야에서 ‘이개, 수장, 무지, 두부, 흉쇄유돌근’과 같이 설명이 없이는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도처에서 쓰이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런 말들은 대개 일본에서 번역어로 쓰던 말들을 별 생각 없이 들여온 것인데 한번 굳어지고 나니 그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일본식 용어를 오랜 시간 동안 계속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의학 분야의 용어 개선 노력은 다른 분야에 비해 부족합니다. 이를 위해 대한의사협회에서는 의학용어위원회를 설치해서 용어 표준화 사업을 펼치고 있습니다. ‘귓바퀴, 손바닥, 엄지손가락, 머리, 목빗근’과 같이 설명이 없이도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말들로 고쳐 쓰도록 권장하고 있으며 반응도 좋은 편입니다.
의사들이 진단 후 써주는 처방전은 일반인이 알아보기 힘듭니다. 자신의 병을 치료하는 약이 무언지 알아야 할 텐데 도무지 알 수 없는 게 처방전입니다. 약국에서도 처방전에 무엇이 적혀 있는지 설명해주는 곳이 별로 없어 이 분야부터 해결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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