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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의 미의식 엿볼 수 있는 건축문화

제주한라병원 2012. 7. 6. 14:16

2011년/8월

이슬람의 미의식 엿볼 수 있는 건축문화

인도의 마지막 왕조 무굴제곡

 

인도는 오랜 시간에 걸쳐 여러 왕조에 의해 분열과 통일을 반복하며 독특하고 다양한 문화를 만들어냈다. 일찍이 그리스 로마의 영향으로 시작된 간다라 불교미술과 굽타 시대에 번성한 힌두이즘 문화 그리고 술탄과 무굴시대의 이슬람 문화 등 인도에서는 시대와 왕조의 성향에 따라 문화의 표현 양식도 많은 차이를 보여주었다. 그 중에서도 인도의 마지막 통일 왕조 무굴제국의 문화는 이슬람 건축과 미술에 있어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특히 무굴제국의 확고한 기반을 마련한 3대 악바르 대제는 라호르 성, 아그라 성, 후마윤 묘, 파테푸르 시크리 등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건축물들을 많이 지었다. 넓은 영토 확장과 더불어 안정된 상업 활동은 무굴제국의 경제적 번영을 보장하였고, 지배자의 문화적 관심은 예술가들에게 자극과 후원으로 이어졌다. 농민과 상인들의 피땀으로 이룩한 경제적인 성공은 부를 축적한 상류층에게 고귀하고 우아한 예술적 허영심을 불러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무굴제국의 활발한 문화 활동은 분명히 상공업의 번영과 때를 같이 하였으며, 궁중생활과 귀족생활은 서구에서도 부러워 할 정도로 호사스럽고 극도로 사치스러웠다.


 

인도의 많은 역사가들은 “무굴제국의 예술은 뛰어난 천재에 의해서 이뤄진 것이 아니라 제국의 富와 지배층의 사치 풍조가 최고의 미를 간직한 건물을 짓게 하고, 화려하고 호화스러운 정원을 만들게 하였다”고 평가한다. 이처럼 무굴 예술의 중심에는 바로 악바르 대제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분명 이슬람을 믿는 무슬림이었지만 예술에 있어서는 힌두의 미술 전통 및 요소를 배척하지 않았다. 그가 지은 라호르 성이나 아그라 성 등은 인도의 전통적인 예술 사조와 페르시아 미술 양식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훌륭한 건축물로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의 관대하고 융화적인 생각은 인도와 파키스탄에서 다채로운 미술이 발달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악바르는 페르시아로부터 훌륭한 건축가를 초빙하여 성, 학교, 별장, 연못 등을 건설하였지만 그 중에서도 부왕 후마윤의 묘와 파테푸르 시크리는 그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훗날 후마윤 왕묘는 샤 자한이 타지마할을 짓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악바르 대제가 보여준 건축에 대한 열정은 후마윤 왕묘 말고도 파테푸르 시크리만큼 그의 열정을 엿 볼 수 있는 곳은 없을 것이다. 아그라에서 서남쪽으로 40km 정도 달려가면 파테푸르 시크리가 나온다. 악바르 대제가 구자라트를 정복한 후 聖者가 사는 곳으로 생각 했던 시크리에 7년에 걸쳐 궁전도시를 건설하고 수도를 아그라에서 ‘승리의 도시’라고 불리는 파테푸르 시크리로 옮겼다. 물론 구자라트를 정복한 기념으로 이곳에 신도시를 지었다고 하지만 악바르는 왕자를 얻기 위해 시크리에 사는 聖者 살림 치슈티(Salim Chishti)를 방문하여 자문을 구한 뒤 왕자 자한 기르를 낳아 감사의 뜻으로 수도를 이곳으로 옮기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붉은 사암으로 도시 전체를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파테푸르 시크리로 들어오는 순간 아름다운 선홍빛의 건물들이 사람들의 눈을 유혹한다. 건물들은 바닥에서부터 천장까지 온통 붉은 사암으로 만들어졌다. 도시는 격자형으로 이뤄져 기하학적인 설계로 한 층 더 세련되고 아름다운 인상을 풍긴다. 파테푸르 시크리의 주요 건물들은 약간 높은 언덕 위에 배치되어 있으며 궁정 지구와 모스크 지구로 구성되어 있다. 궁정건물들은 마치 離宮과 같은 느낌을 준다. 널찍한 마당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디완이 암(Diwani-am)의 건물과 그 서쪽에는 디완이 하스(Diwani-has)의 건물이 들어서 있고, 남쪽에는 5층 누각의 판치 마할(Panch Mahal)이 우아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다. 이 건물들에 조각된 장식들은 이슬람 건축 양식보다는 인도 건축의 전통적 양식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건물 내부 중앙의 독특한 기둥 양식을 보여주는 디완이 하스는 중앙 기둥 바로 위에 악바르 대제의 좌석을 만들어 놓은 것이 특징이다. 석재를 마치 목재와 같이 架構 구조로 만든 판치 마할은 이슬람 양식에 힌두교와 자이나교 건축문화의 전통이 한데 어우러져 독특한 악바르 대제 스타일 양식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 악바르 대제는 무슬림의 출신 아내와 결혼하면서 이슬람의 문화를 받아 들였고, 지방 호족 세력을 규합하면서 지방 문화 또한 배척하지 않았다. 역사적인 기록을 보면 악바르 대제는 인도에서 널리 성행한 힌두교, 자이나교, 심지어는 기독교를 믿는 후궁들을 위해 궁전 안에 각각 따로 거처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 정도로 종교적으로 배려심이 굉장히 깊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파테푸르 시크리 건축물에서 다양한 종교의 양식들이 조금씩 보태어져 새롭고 참신한 문화 융합의 건축 양식이 선보인 것 같다. 하지만 악바르 대제는 ‘승리의 도시’ 파테푸르 시크리를 건설하고 15년도 채 살지 못하고 다시 수도를 아그라로 옮겨 갔다고 한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먹을 물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그로 인해 역병까지 도시를 휩쓸고 나가자 하는 수 없이 천도를 하게 된 것이다.  그 후 300여 년 동안 아름다운 파테푸르 시크리는 주인도 없이 빈 채로 잘 보존되어 그 당시의 건축문화의 정수를 느낄 수 있는 소중한 문화 자원이 되었다.

 


무굴제국의 문화를 발전시킨 악바르 대제가 죽자 그의 아들 자한 기르가 왕위에 올랐지만 그는 별다른 건축물을 남기지 못했다. 그러나 자한 기르는 아버지의 묘를 유언대로 잘 완성시켰으며, 자신의 아들 샤 자한을 통해 무굴제국의 새로운 건축문화의 장을 열어주었다. 무굴제국의 5대 황제 샤 자한 때에는 그야말로 인도와 페르시아 건축 양식이 정점에 이르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그라의 타지마할, 모티 마스지드, 그리고 델리의 레드포트 등이 샤 자한 시대에 만들어진 대표적인 건축물들이다. 위대한 건축 왕, 샤 자한은 아그라 이외에도 라호르, 카슈미르, 카불, 아즈메르, 아메다바드 등지에 궁전, 성, 회교사원, 정원 등 수많은 건축물을 지었지만 그 중에 단연 돋보이는 것은 청정함과 우아함을 동시에 자랑하는 타지마할과 모티 마스지드이다. 모티 마스지드는 인도와 페르시아 건축 양식이 훌륭하게 조화된 대표적인 건축물이며, 타지마할은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이 무굴제국의 예술을 대표하는 최고의 걸작이다. 22년 동안 2만 명의 장인이 동원되어 만든 타지마할은 세계불가사의로 기록될 만큼 장대함과 경이로움 그 자체이다.

 


대체로 샤 자한 시대의 건축물 구조는 그의 할아버지 악바르 대제 때의 건축에 비해 웅장함과 독창성이 뒤지지만 사치스럽고 풍부한 기교면에서는 단연 앞선다고 평가받는다. 악바르 대제의 건축 양식이 남성다운 힘의 건축이라면, 샤 자한은 부드럽고, 우아한 기풍을 가진 여성미가 특징이다. 그러나 세계의 건축가들이나 일반 사람들은 악바르의 힘찬 남성미보다는 샤 자한의 여리고 아름다운 스타일을 더 좋아한다. 그 이유는 사람마다 다 틀리겠지만, 보통 사람들은 남성적인 힘보다는 사치스럽고 값비싼 장식품으로 치장한 샤 자한의 건축 양식을 더 선호하는 것 같다.

 


악바르와 샤 자한의 건축양식을 두고 우열을 가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임은 틀림없다. 서로 다른 느낌의 건축 양식을 보여 준다는 것은 그 시대에 얼마나 문화적 다양함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악바르 대제 시대 때에는 무갈 제국이 안정된 왕국으로서 기틀을 확고히 정립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다양한 호족 세력의 문화와 종교의 융합이 건축 양식에 반영되었고, 샤 자한 때에는 무굴제국의 전성기답게 막강한 왕국의 세력과 경제적인 부의 축적으로 인간의 미의식을 극대화 시킬 수 있었다. 샤 자한의 아름다운 타지마할이 나오기까지는 당연히 바부르부터 시작해 자한 기르까지 무굴제국의 문화적 정책이 뒷받침이 되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13세기 몽골에 의해 중국 미술, 인도 불교, 박트리아, 몽골의 미술 등이 혼합된 형태가 페르시아 전해졌다가 티무르에 의해 다시 인도에 도입되었다. 무굴제국의 초기 황제인 바부르나 후마윤 시대에는 예술 사조에 큰 특징은 없었지만 악바르 대제 때부터 인도 중국 페르시아 미술의 특징들이 동화되고 융화되어 새로운 예술품들을 창조하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악바르의 아버지 후마윤이 페르시아에서 망명생활을 끝내고 돌아올 때 많은 페르시아 화가와 건축가들이 함께 들어와 인도에 이슬람 예술을 전했으며, 악바르는 궁중에 100여 명의 힌두 화가와 이슬람 화가를 발탁하여 무굴제국의 르네상스를 이끌어갔다. 수대에 걸친 황제들의 열정과 후원으로 마침내 샤 자한의 타지마할을 비롯한 우수한 예술품들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인도는 한 시대를 풍미하고 사라진 통일 왕조들을 통해서 그 당시 사상과 철학 그리고 예술의 다양함을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아잔타가 불교의 메카가 되고, 캬쥬라호가 힌두교의 성지인 것처럼 악바르와 샤 자한이 남긴 아름다운 건축물과 예술품들은 이슬람의 정수를 맛볼 수 있는 계기가 된다. 300여 년 동안 이루어진 무굴제국의 화려함이 서구 제국주의에 의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그들이 남긴 건축물들은 인도의 마지막 왕조 ‘무굴’을 영원히 기억하는 상징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