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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리면서도 닫힌 공간 건축의 백미

제주한라병원 2011. 11. 10. 09:37

2010년 / 3월

 

숨은 제주, 알고 싶은 제주 -  올레

열리면서도 닫힌 공간 건축의 백미

 

올레가 뜨고 있다. 제주어인 ‘올레’는 돌담 사잇길로, 제주의 특이한 공간개념을 담고 있다. 하지만 그같은 올레가 ‘걸음’이라는 단어와 합쳐져 ‘미학’으로까지 발전했다. 이젠 ‘제주올레’라는 이미지가 관광의 트렌드까지 좌지우지할 정도가 됐다. 서명숙 (사)제주올레 이사장의 발품으로 시작된 제주올레. 그렇다면 ‘올레’의 원래 의미는 무엇이며,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 탐색해보는 것도 좋을 일이다.

 

 

 


사라지는 제주의 미(美)

옛 놀이터. 거기엔 미끄럼틀도, 시소도 없었다. 단지 애들의 웃음소리만 가득했을 뿐이다. 위엄을 갖춘 팽나무와 돌담에 기대 말타기를 즐기는 사내들의 외침, 간혹 리어카와 자전거도 등장하곤 했다. 표준어로 고샅으로 불리는 올레의 흔하디흔한 모습들이었다. 그렇지만 이는 한갓 기억속의 풍경일 뿐이다. 기억 속에 묻힌 보따리를 훌훌 풀어내지 않는다면 그 풍경들은 이젠 제주 어디에서도 찾기 힘든 옛 것이 돼버렸다. 왜 그렇게 됐냐고 말을 할 필요는 없겠다. 모두 잘 먹고 잘 살자고 외친 이유 하나로, 올레는 도시개발의 피해자가 됐다.


그렇게 해서 올레는 사라지고 있다. 가장 멋있는 공간이었고, 삶 속의 여운이었다. ‘사라짐’의 현재진행형인 올레. 그나마 올레가 잘 보존된 곳들이 있다. 한적한 마을의 올레. 도시의 팽창에 굴하지 않고 고이 간직된 올레는 만남을 이끌어내는 살아있는 공간이다. 구불구불한 것이 위엄은 없으며, 돌담보다는 높지만 사람들 사이의 벽을 만들어내지 않는 멋은 그야말로 일품이다.

 

공유 공간이면서 사유 공간

올레는 공유공간이기도, 사유공간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고샅이라는 골목길이나 올레나 비슷한 개념이다. 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 다른 지방에서 말하는 골목길은 이웃이 함께 하는 도로의 개념을 지니지만 올레는 그같은 공유개념에다 자신의 집마당에 진입하는 사유공간을 진입도로로 삼을 때도 포함된다.


제주의 마을공간은 한질(큰길)에서 갈려나온다. 한질에서 뻗은 동네를 이어주는 거릿길, 거릿길에서 올레와 올레를 이어주는 먼올레가 나오며, 공유공간과 사유공간이 모두 포함된 올레로 나눠진다.


올레는 제주 자연이 만들어낸 산물이라는 점에서 특징이 묻어난다. 바람이 드센 제주이기에 올레라는 공간 건축이 가능했다. 구불구불하기에 강한 바람의 힘을 분산시키고, 마당의 먼지날림과 널어놓은 곡식의 흐트러짐도 막을 수 있었다.


게다가 애초에 곧지 못한 올레는 역설적이게도 대문 없는 제주도에서는 프라이버시를 지키는 효과가 있었다. 대문 없는 집을 갖추고도 프라이버시를 지킨다는 말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올레의 능청맞은 구부러짐은 집 안을 직접 볼 수 없게끔 시선을 차단하는 효과가 있다.

 

‘올레’를 벤치마킹하는 현대 건축

도시개발은 어쨌거나 기존의 문화를 살리기보다는 파괴하는 방향으로 틀어졌고, 그렇게 될 수밖에 없던 게 사실이다. 아우성치며 도시개발을 해달라고 요구한 건 우리였다. 길이 생기면 무조건 좋아라 했다. 그것도 구불구불한 길이 아니라 곧장 뻗은 길을 원했다.


격자형의 도시개발은 필연적으로 기존마을의 파괴를 불렀다.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건 도시개발을 원한 우리였고, 제주에서는 일명 ‘삼춘?으로 통하는 마을공동체의 파괴가 뒤따랐다. 한참 돌아보고서야 옛 추억이 어린 공동체가 그리워졌으나 되돌릴 수는 없었다. 마을공동체의 근원이던 올레는 개발로 끊어지고 사라지고 난 뒤였다.


현대 도시개발은 아직까지도 공간의 멋이나 운치보다는 효율성을 추구한다. 또한 거기엔 거대함이 뒤따르면서 작고 아름다운 것들의 퇴보를 담보로 삼고 있다.


그래도 올레의 힘은 강하다. 사라지고 있지만 현대건축에서 올레를 빌리곤 한다. 올레를 벤치마킹하는 사례들이 있다. 현대와 예전의 건축은 다르지만 좋은 공간에 대한 인식은 매한가지이기 때문이다.


올레는 한마디로 열려 있는 공간이며, 여유를 주는 공간이다. 열려 있다는 의미는 사람과 사람사이의 회합과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하게 한다는 뜻이며, 올레에서 느끼는 여유는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목적지까지 이르는 여정의 아름다움으로 인식하면 딱 맞다.

 

 

 

 

삶의 여유를 느끼기에 그만

건축가들은 스스로 자신의 작품에 올레의 의미를 담았다고 말하기도 하고, 그렇게 말하지 않는 건축가들의 작품 속에도 오래전에 체득돼 있던 올레 개념을 읽게 된다.

몇가지 작품을 보자. 과천에 있는 국립 현대미술관은 여유롭게 진입하도록 설계돼 있다. 이 작품은 올레를 담았다고 말하지 않지만 올레에서 느끼는 긴 여정이 그대로 묻어나 있다. 진입로를 우회시켜 건물과 자연을 음미하면서 건축물에 다가서라는 의미다.


1990년대 후반 이색교회의 상징처럼 된 강정교회도 그렇다. 필로티로 구성된 1층은 커뮤니티의 장소이며, 이 곳에서 호흡을 가다듬은 뒤 본당인 2층으로 향하도록 돼 있다.


사람들이 사는 곳은 공간이다. 올레를 바라보면 공간 건축을 즐긴 옛 사람들의 사상을 엿보게 된다. 삭막하기만 한 회색빛의 도시와 답답한 벽돌담에 의지하는 사람들은 그걸 모른다.


한번쯤 올레를 찾아 떠나보자. 돌담 사잇길을 걷는 멋의 여유가 이것이구나 함을 느낄테다. 제주올레가 뜨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걸으면서 삶의 여유를 찾는 일. 일찍이 제주도 사람들은 올레를 통해 그런 여유를 창조한 이들이다. <김형훈 미디어제주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