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 1월
숨은 제주, 알고 싶은 제주 - 환해장성
바다를 둘러 탐라를 지킨 ‘만리장성’
섬에는 돌이 있다. 그것도 검고, 구멍이 숭숭 뚫린 돌이 널려 있다. 바닷가로부터 마을을 지나 한라산까지 끝도 없이 존재하는 그들은 이리저리 굴러다니기도, 한 곳에 자리를 트고 웅크려 있기도 하지만 늘 우리와 함께 하고, 함께 해야 할 벗이었다. 그래서 그 돌은 제주를 말하는 상징이 됐고, 제주 역시 그 돌을 벗어나서는 얘기하지 못한다. ‘제주인이라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돌의 품에 있다’고 말한다고 해서 틀렸다고 할 사람은 솔직히 없다.
바다에서 보이는 거대한 성
제주를 왔다간 사람들은 그 돌에 푹 빠져버린다. 산에서도 놀라고, 밭에서도 놀라고. 어떻게 그 많은 돌이 뛰쳐나와 마치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는지는 모른채 자기네들과 전혀 다른 색다른 풍경 자체에 감탄사를 내보낸다. 그러나 감탄사만 던지다간 제주를 다 보지 못한다. 아파야만 했던 제주사람들의 숨소리도 듣고 볼 줄 알아야 한다.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있는, 바닷가를 빙 둘러선 돌무더기인 환해장성을 찾아보자. 지금은 파괴절차가 다 진행된 상태여서 얼마 남아 있지 않고, 혹은 밭담을 닮은 존재로 치부되기도 하지만 애초엔 제주 바닷가 300리를 휘감던 건축물이었다.
멋있지만 멋있다고 불러도 좋을까. 멋있다고 부르면 환해장성이 좋아하려나? 환해장성엔 남모를 아픔이 숨겨 있기에 어쩐지 멋있다는 표현이 어색하다. 성(城)이란 무엇인가? 적과의 대치를 위해 필요한 군사 방어시설이지 않는가. 우린 살기 위해 돌을 나르며 이것저것을 만들었다면 환해장성은 죽지 않으려 몸부림 친 결과물이었다. 환해장성은 밭담이나 올랫담처럼 경계를 나누기 위한 작업도, 바람을 이기려 한 것도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다.
꼿꼿이 바다를 응시하는 환해장성은 이렇게 들려준다. ‘그대들 할아버지․할머니들의 가슴 저민 숨소리가 내 품에 있다’고.
화북 등 10곳 가량이 보존돼
김상헌은 「남사록」에서 환해장성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바닷가 일대는 돌로 성을 쌓았는데, 연달아 이어지며 끊어지지 않는다. 섬을 돌아가며 곳곳이 다 그러하다. 이것은 탐라 때 쌓은 만리장성이라고 한다.' 김상헌이 살았던 17세기엔 제주 해안가 곳곳이 환해장성으로 둘러 있었다는 말일테다. 하지만 지금은 제주시 화북, 북제주군 애월․행원․한동 등 10곳 가량만이 당시 존재했음을 흔적으로만 말한다.
김상헌은 누구에게서 들었는지 모르지만 탐라 때 것이라 했다. 이원진이 쓴 「탐라지」고장성(古長城)조에는 삼별초의 제주 진입을 막기 위해 쌓았다고 한다. 「탐라기년」에는 헌종 11년(1854년) 영국 선박이 1개월동안 우도 연안의 수심을 측정하자 권직 목사가 크게 놀라 그해 겨울 도민을 총동원해 환해장성을 쌓았다고 한다. 지금 남아 있는 환해장성의 흔적들은 그 당시 만들어진 자취임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환해장성이 삼별초의 진입을 막기 위해 처음으로 쌓인 건 아니다. 김상헌의 말처럼 오래전(탐라)부터 바다를 두르는 성은 있어왔다. 탐라국을 지키던 제주사람들이 제주성을 만들었듯 지배층에 의한 축성 작업은 바다라고 없진 않았다. 더욱이 제주도엔 외세의 침입이 늘 있어왔기에 죽기 않기 위해 해야 했던 일은 성을 쌓는 것이었다. 무너지면 쌓고, 또다시 무너지면 쌓아 올리는 일을 해오며 제주라는 섬을 우린 지켜왔다.
적을 막기 위한 군사적인 목적
성은 아무렇게나 지어지는 것도 아니고, 성격이 모두 똑같지도 않다. 읍성과 진성은 통치를 위한 권위적인 요소와 행정적 편의를 갖춘 성이라면, 환해장성은 행정적인 목적은 전혀 없는 적을 막기 위한 군사적 목적만이 있는 성이다.
성을 쌓는 방법도 다르다. 읍성과 진성을 쌓는데는 인공미가 가미된다. 돌을 잘 가다듬어 쌓기에, 쌓는다는 의미보다는 붙인다는 의미가 더 맞을 듯하다.
환해장성은 그렇지 않다. 거기엔 인공미란 애초에 없다. 주변에 널린 자연석을 엇갈려가며 만든 허튼층쌓기 방식이었다. 돌의 크기는 일반적으로 성 아래쪽이 크며, 위로 갈수록 작아진다. 단순하게 안쪽과 바깥쪽을 돌로만 쌓는 것도 아니었다. 여장(女墻)이라고 부르는 성가퀴를 만들기도 했다. 성가퀴는 적의 침입을 효과적으로 관측하고, 몸을 숨겨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성 위에 덧쌓은 낮은 담으로 화북의 환해장성에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1998년에야 문화재로 지정
환해장성은 밀물 때면 바닷물이 닿기도 할 정도로 바다와 바짝 붙어 있다. 그러나 잇따른 개발로 환해장성은 온전히 보전되지 못했다. 제주바다를 빙 둘러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겠다는 원대한 해안도로 개발로 인해 환해장성은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져갔다.
비지정 문화재로 수모를 겪던 환해장성은 지난 1998년에야 제주도기념물 제49호로 지정돼 보호되고 있을 뿐이다.
지금도 환해장성이 위치한 곳은 으레 군사시설이 웅크리고 앉았다. 그런 곳에 있는 환해장성은 전투배치용 참호로 둔갑, 환해장성의 원형이 어떤 것인지를 헷갈리게 만들고 있다.
복원을 하면서 너무 잘 다듬어진 환해장성도 있어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문화재 복원은 사실에 바탕을 둬야 하기 때문이다. <김형훈 미디어제주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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