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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매거진/제주의이야기

바다 경영의 시작, 그건 바로 포구였다

제주한라병원 2011. 6. 2. 09:47

2009년/11월

 

보복포구

 

사람들은 바다를 향해 낭만적이라는 단어를 던진다. 옹기종기 모여든 어선들의 모습이 정겹다며 그렇게들 말을 하고, 서로 어깨를 맞대 바다를 응시하곤 한다. 그러다 등대 불빛에 취하기도 한다. 정말 바다는 낭만적일까.


지금이야 제주바다에서 낭만을 얘기하겠지만 제주의 실상은 그렇지만은 않았다. 제주 바다는 뭔가 달랐기 때문이다. 거기엔 뭍지방과 다른 포구가 있다. 그 포구를 알아야 다른 곳과는 차별된 제주 바다를 조금이나마 알게 된다.

 

화산섬에 등장한 특이한 포구

 

 

시흥포구

 

제주 바다는 화산섬이기에 다르다. 삶을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포구였지만 화산섬이라는 특성상 쉽게 만들어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제주도의 해안선은 단조롭고 썰물과 밀물의 차이도 크지 않았다. 그런 특징들은 천연적인 포구를 갖추기 어려웠고, 제주 사람들이 얼마나 힘 들여 포구를 만들었는지를 보여준다.


제주사람들은 숱하게 널린 검은 돌을 등에 지고 날랐다. 담벼락으로 밭담으로, 혹은 산담으로 쓰였던 돌은 바닷가의 포구를 만드는데도 썼다. 구멍이 뚫린 그 돌을 하나 둘 옮겨 바다에 채우는 작업이 곧 제주 바다 경영의 시작이었으며, 다른 지역 사람들과 교류하는 소통의 창구 역할을 했다.


고전소설 배비장전을 잠시 훑어보자. 배비장의 어머니는 아들이 제주로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제주는 수로 천리, 육로 천리의 먼 길이니 제발 가지 말라”고 말렸다.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배비장 일행은 거친 파도를 헤치며 제주에 내렸다. 그곳은 바로 제주시 화북이었다. 제주성과 가장 가까웠던 화북 포구는 제주성의 관문이었으며, 국문학의 백미였던 배비장전의 배경이었다. 이렇듯 포구는 세상 사람들이 제주와 인연을 맺는 곳이기도 했다.

 

탐라국 번성은 포구에서부터

 

 

집탁개포구

 

제주의 포구는 100곳이 넘는다. 자연적 여건이 되지 않았기에 거대한 규모가 아니라 소규모로 발달했다. 1개 마을에 여러 개의 포구를 갖추기도 했다. 제주에서 포구는 성창이라고도, 혹은 돈지라고도 불렸다.


포구는 제주사람들의 땀이 배기도 했지만 자연적으로 이뤄진 포구도 있었다. 천연포구로는 서귀포시 성산읍 온평리의 쾌성개를 들 수 있다. 쾌성개는 탐라국의 기원과 깊은 관련이 있다. 탐라국 세 왕자가 벽랑국의 세 공주를 맞은 곳이기 때문이다. 인공이 전혀 가미되지 않은 쾌성개는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충청도 선적이 이 곳에 배를 대고 육지로 해녀들을 실어나르던, 뱃사공들에게 아주 중요한 포구였다.


자연포구로는 쾌성개와 함께 경치가 뛰어난 서귀포시 월평포구를 빼놓을 수 없다. 관광지로 이름난 월평포구는 배를 가둬두기엔 그야말로 안성맞춤이다.


그러나 제주도의 모든 포구가 자연적일 수는 없다. 오죽했으면 조선시대 사료에는 제주 포구의 열악한 입지여건을 거론했을까. 조선 선조 때 김상헌은 「남사록」을 통해 ‘제주 해변은 바닥이 얕고, 바위는 뾰족해 배를 부수기 일쑤다’고 표현했다.


제주사람들은 물속에 잠긴 암초인 ‘여’를 이용해 포구를 만들었다. 여는 코지와 달리 물의 날고 듦에 따라 모습을 드러내곤 한다. 썰물 때 비치는 여에 버팀돌을 쌓고 또 쌓고 해서 포구는 만들어졌다. 포구의 입지조건은 어쨌든 여와 코지가 필수였다. 지금처럼 거대한 방파제를 만들 여력이 없었기에 천연 방파제 구실을 하는 여와 코지가 있는 곳에 포구는 존재했다.

 

산업화에 밀려 사라지는 포구

 

 

큰개포구에 매인 배

하지만 포구는 예전의 모습은 아니다. 배의 규모도 커지고, 수도 많아지면서 자그마한 포구는 변화를 요구받았다. 까만 돌로만 이어졌던 포구에 콘크리트가 덧씌워지거나, 새로운 성창이 만들어지면서 예전의 포구는 사라지고 있다.


포구와 함께 제주바다의 역사를 말해온 도대불도 흔적으로 말을 할 뿐이다. 도대불은 전기가 들어오기 전에 쓰인 등대였다. 현재 남아 있는 도대불로는 북촌리의 것이 가장 오래됐다고 한다.


도대불이나 포구를 만든 재료는 모두 검은 색의 돌이었지만 이젠 하얀 콘크리트와 테트라포트(일명 삼발이)가 포구를 점령하면서 거센 파도의 하얀 포말과 짝을 이루던 검은 돌의 색감이 사라지고 있어 아쉽다.

 

검은 색감의 포구에 너도나도 반해

조천 포구를 찾은 시인 곽재구는 그의 저서 「포구기행」에서 이렇게 읊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지상에서 아파하고 그리워하고 쓸쓸해하며 이승의 삶을 마쳤을까요. 저기 보이는 저 검은빛의 용암들과 파도들. 어쩌면 지난 천년의 세월동안 이루지 못한 인간의 꿈과 그리움들의 가슴 먹먹한 빛깔은 아닐런지요.”
그리움으로 멍든 가슴을 표현하기에 그만인 제주 포구. 검은 색감에 취한 시인 곽재구의 심정을 알 만하다.
북서풍이 불어오는 계절, 겨울이다. 점차 사라지는 제주 포구는 예전의 맛은 없지만 그래도 곽재구가 반한 검은 색감은 세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매력 포인트다. 막막했던 가슴을 달래기에 제주 포구만한 곳이 없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김형훈 미디어제주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