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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녀, 가족 살리기 위해 바다 택했다

제주한라병원 2011. 6. 2. 09:39

2009년/10월

 

척박한 땅과 함께 바다 또한 밭으로 일구는 제주좀녀

 

테왁을 걸메거나 품에 안고, 한 손엔 까꾸리를 들기도 했다. 머리엔 하얀 물수건을 쓴 무리들. 하나 둘 서귀포 앞바다에 떠 있는 문섬을 향해 몸을 던진다. 오래된 사진이어서일까, 아니면 흑백의 풍경이라는 점 때문일까. 만농 홍정표 선생 사진집 속의 해녀들은 한결같이 멋있어 보인다. 그러나 그건 사진 한 컷 속의 환상일 뿐이다.

 

바다와 함께 한 이들

바다는 그들에게 생사를 넘나드는 투쟁의 대상이었다. 바다가 변치 않듯 그들은 수백년을 변함없이 바다와 함께 해왔다. 거기엔 수탈의 역사에 맞서 이겨내려는 제주 여성의 끈기가 묻어 있다.


척박한 땅 제주에서 나봐야 뭐가 나올까. 그러나 갖가지 세금은 제주민들을 압박했다. 그래서 해녀들은 척박한 땅과 함께 바다 또한 밭으로 일구게 됐다. 해녀들은 밭에서 김을 매다가도 물질을 할 시간이면 무리를 지어 바다로 나갔다. 그래야만 남편도 지키고, 식솔들도 온전히 먹여 살릴 수 있었다. 그런 자맥질은 계절도 가리지 않는다. 추운 겨울이라도, 눈이 오더라도 계속 됐다. 세종 25년(1443년) 기건 목사는 전복을 따는 그들의 고통을 보고는 재임기간중 전복을 밥상에 올리지 못하도록 했을 정도였다.


일제 때부터는 돈을 벌기 위해 뭍으로도 몸을 던졌다. 혹은 일본까지의 ‘바다 원정’도 계속됐다. 봄이 되기전 시작되는 원정은 8월까지 이어졌다. 바다 위에서 그들은 고향을 그리며 이렇게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어뜩 7월/동동 8월/어서나 빨리/돌아나오라’. 7월이 빨리 물러가고 8월이 되어 고향 제주에 가고 싶음을 이런 가락으로 달래곤 했다.


차가운 겨울. 물소중이만 입던 당시, 물에서 나온 그들은 뚜데기를 걸치고 불턱에서 시린 몸을 달랬다. 소금기가 바짝 말라버리면 그들의 몸은 뱀살처럼 이지러지는 모습이 되기 일쑤였다. 한 때는 멸시의 대상이던 그들. 몇백년의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야 그들은 제주의 상징이 됐다.

 

사라져가는 용어 ‘좀녀’

 

 

필자는 제민일보 재직 당시 해녀 덕분에 먹고 살 수 있었다. 글을 쓰는 기자 입장에서 해녀는 필자에게 글감을 제공한 존재였고, 수년을 함께 한 벗이었다. 지난 2005년부터 ‘인류문화유산 제주녀’라는 타이틀로 장기연재를 해왔으며, 지금은 제민일보 후배들이 맡아 글을 써오고 있다.


여기서 잠깐, ‘녀’라는 용어를 살펴보겠다. ‘녀’는 물질을 하며 소라·전복 등을 캐는 여성을 제주에서 부르는 말이다. 제주에서는 오래전부터 그들을 ‘해녀’라고 부르지 않고, 녀라고 해왔다. 「한라병원보」가 바다를 건너 육지부 곳곳에 퍼져가기에 ‘녀’라는 용어를 제대로 전파하는 게 중요할 듯하다.


애당초 해녀는 없었다. 해녀라는 용어 자체는 일본에서 가져왔다. 일제 때 퍼진 ‘해녀’라는 용어는 바다에서 일하는 여자의 뜻으로, 그렇게 본다면 한글날에 등장하는 용어순화 대상이다. 자맥질을 하는 제주 해녀 입장에서는 ‘녀’라는 용어가 직업으로서의 물질에 보다 가깝다. 제주에서 부르는 ‘녀’는 한자로 잠녀(潛女)라고 쓴다. 조선시대 문헌에도 자주 등장한다.


‘녀’를 발음할 때는 주의할 점이 있다. ‘녀’엔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아래아(ᐠ)가 남아 있기에 그 발음을 존중해줘야 한다. 제주에서는 아래아(ᐠ)를 아(ㅏ)로 읽지 않고 오(ㅗ)에 가까운 발음을 한다. 따라서 ‘녀’를 읽을 때 ‘잠녀’가 아닌 ‘좀녀’로 읽으면 제주어를 제대로 구사하는 셈이 된다. 다른 아래아(ᐠ)도 아(ㅏ)가 아닌 오(ㅗ)로 읽는다면 읽어버린 조선시대 옛말을 살려 읽게 된다.

 

그들은 바다의 개척자

해녀들을 만나면 육지를 갔다 온 이야기를 듣는다. 4년전 취재 때 80세였던 양삼옥 할머니. 17세 때 시집 온 양 할머니는 늙은 몸이지만 바다를 뗄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지금은 북한 땅이 된 황해도 옹진까지 오가며 제주인의 끈기를 뭍사람들에게 전하곤 했다.


양 할머니처럼 뭍에 물질을 나가는 일은 흔했다. 육지 곳곳, 일본, 중국,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물질을 오갔던 이들이다. 그들의 루트를 따라가다 보면 중남미의 이민사와도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갖게 한다. 취재 중 중남미로 간 해녀가 있을 것이란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바다에 나서는 건 해산물 채취가 생명과도 바꿀 수 없는 중요한 것이었기에 그랬다. 해녀들이 노를 저으며 바다로 나갈 때 부르는 노랫말 가운데 ‘배또롱(배꼽)은 넘(남)을 준들 요넘(노)은 못준다’고 할만큼 바다는 소중한 존재였다.

 

사라지기 전에 문화보존을

 

 

해녀는 멸시의 대상에서 탈바꿈하고 있다. 세계인류문화유산으로 등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을 정도다. 일부 공무원들은 투박하고 억센 해녀를 하찮게 보기도 하지만, 사라지고 있는 것이기에 가치를 부여해야 한다.

만일, 해녀가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물론 해산물을 캐내는 새로운 직업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해녀라는 문화 자체가 사라지고 없는 시점이다. 현재 물질을 하는 제주도 해녀 10명 중 7명은 60대이상이다. 이런 추세라면 해녀문화는 20년내에 없어지고 만다.


해녀, 그들에겐 얘깃거리가 많다. 지면을 통해 풀어내기엔 한정이 있다. 다 풀어내지 못한 숱한 이야기들이 박물관으로 들어가기 전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문화보존에 대한 공감대다. 얼마전 ‘제주칠머리당영등굿’이 세계무형유산으로 등재됐다. 이를 기점으로 제주 해녀문화 역시 가치 있는 세계유산으로 올라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김형훈 미디어제주 편집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