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학 화가 고영만, 침(針)으로 생명을 그리다.
한 화가의 삶은 고스란히 자신의 작품 안에 투영된다. 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그가 왜 그것을 그렸는지를 말이다. 고영만은 스승 없이 혼자 그림을 그린 독학 화가다. 미술 자료가 부족한 시절, 그는 신문스크랩. 잡지 화보를 열심히 모으며 그것을 보고 그리고 또 그렸다.
독학 화가 고영만 그는 4·3사건과 한국전쟁 시절 14살 나이에 부모님을 잃고 동생을 돌보며 목공소, 이발소 그리고 공군부대에 징발된 박 의원 등에서 허드렛일로 끼니를 넘겼다. 서울이 수복된 후 공군이 섬을 떠난 후 어린 동생과 함께 전쟁고아 보호시설인 한국보육원에 입소하게 된다. 이때 고영만은 대학생 보모였던 구대일로부터 처음 수채화를 배워 해마다 제주시 관덕정에서 열리는 학생미술전람회에 참가했다.
그림에 꽂힌 고영만은 중학교 3학년이 되자 낮에는 그림을 그리고, 저녁에는 공부를 위해 오현중학교 야간부를 다녔는데 그 곳에서 김택화(서양화가, 2006년 작고)를 만났다. 둘은 제주시 곳곳을 스케치하러 다니면서 극장 간판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당시 성길사한(징기스칸) 영화를 고영만은 포스터대로 그림을 그리고, 김택화는 ‘성길사한(成吉思汗)’이란 한자를 써서 받은 수고비로 중국집 찐빵을 처음 사먹었다고 한다.
그 후 고영만은 제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한림초등학교 교사가 되었고, 그림을 위해 다시 중등 미술교사로 근무하면서 서양화가로 활동하였다.
새로운 화풍에 대한 고민 고아원생 고영만 화백은 독학으로 화가가 되었지만 화가라는 명함을 내밀기 위해서 남들과는 뭔가 다른 화풍이 있어야 한다고 고민했다. 당시 제주도 지역 화풍은 대학교육을 받은 화가들의 사실주의와 반추상, 추상표현주의 등이 혼재했다.
그는 1960년대 남아있는 4점의 표현주의 작품과 1970년대 이후 그려진 제주 옛 생활도구들을 그린 작품, 그리고 민속적인 생활사 장면들, 제주의 마을과 오름, 산과 바다 등 주변의 풍경을 수없이 그렸다. 여전히 사실주의를 지향했지만 갈수록 획기적인 화풍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여 새로운 실험에 도전하게 된다.
그는 제주도 자연에서 생명력의 원리를 관찰하면서 생명체마다 섬유소(纖維素) 조직이 다양하다는 것을 선으로 표현하고자 시도했다. “선은 흐름이고 연결이고, 공급선으로 기운을 생성한다.” 그의 말대로 ‘선(線)의 자율성 확대’라는 의미로 생명체를 선의 흐름으로 만들어진 형태임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는 추구하고자하는 선의 질을 완성하기 위해 붓으로는 만족치 못해 가는 침관(針管)을 들었다.
침선유화(針線油畵)의 탄생 침선유화에서 침(針)은 바늘처럼 액을 주입할 수 있는 가느다란 침관(針管)이다. 침선기법(針線技法)은 주사기를 사용하는 것처럼 선질(線質)의 형태를 만들어내는 행위다.
침선유화는 빈 물감 튜브의 뚜껑에 가는 침관을 부착해 각기 다른 여러 색의 튜브를 오로지 손의 압력으로만 밀면서 짜내는 작업방식이다. 이 작업은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하다. 유화물감이 마르기 전에 일정한 크기의 선으로 된 패턴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색채 계획, 형태 구성, 굵기와 속도, 물감 마르기까지 건들지 말아야 하는 원상태 관리가 매우 까다롭다. 그는 약 10년을 침선유화 작업을 했는데 손가락, 팔, 어깨, 눈이 나빠져 무려 6개월간의 병원 치료를 받은 후부터 침선기법을 그만 두게 되었다.
그가 완성한 작품들은 유화가 낼 수 있는 매혹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가는 선이 반복된 정교함과 요철의 유화 선묘에 빛이 반사되는 효과는 참으로 신비감을 더한다. 그러나 까다로운 작업의 방식을 알고 나서는 누구도 감히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침선유화는 마치 고도의 테크닉이 필요한 반도체 기술처럼 무척 집중력을 요하는 정교한 기술이 사용된 예술이다.
침선유화는 이중섭이 은지화를 창안했듯이, 유화라는 재료를 가지고 처음 실험한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회화 기법인 것이다.
고영만 화백은 우주는 모든 것이 서로 연결돼 있고 삶이든 자연이든, 그것을 표현하는 예술이든 시간의 물살을 타고 공간에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림으로 생명과 삶을 표현한 그는 선과 생명을 침선기법을 통해 연결시키며, 그림으로 그의 인생을 그려 넣은 화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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