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의 길 가는 그대의 물음
변시지, 영원회귀와 바람의 삶
일본 생활 24년 만에 귀국 변시지(1926~2013)는 서귀포시 서홍동 출신으로 1931년 여섯 살에 아버지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 하나(花園) 고등학교와 1942년 오사카 미술학교 서양화가를 다녔다. 이때 한국인 학생으로는 백영수, 제주 학생으로는 조천 출신 송영옥, 다호 출신 양인옥이 있었다.
1945년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도쿄로 가 데라우치 만지로(寺內博治郞) 문하에 들어갔다. 데라우치 만지로는 일제강점기 조선미술전람회 심사위원을 역임한 중견 화가였다. 데라우치 만지로의 후광을 얻어 일본 광풍회에서 수상하며 입지를 굳힐 수 있었고, 젊은 나이에 광풍회에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이후 변시지는 일본 도쿄와 오사카를 오가면서 작품 활동을 하다가 1957년 11월 15일 돌연 한국으로 영구 귀국을 한다.
전후 한국 사회는 도시 재건에 정신이 없고 모든 것이 새로 시작하는 분위기였다. 변시지는 귀국 후 1958년 서울 화신백화점 화신화랑에서 제4회 유화 회고전을 열었는데 이 전시가 자연스럽게 귀국 발표전이 됐다. 제주를 떠난 지 24년 만의 일이다.
비원파(秘苑派) 1960년 서라벌 예대 미술과 학과장으로 초빙되고, 이 해 이학숙 여사와 결혼식을 올렸다. 다시 제주도에 내려오기까지 20년간의 서울 생활이 이어졌다. 그 기간 동안 덕수궁 비원을 자주 찾아 몇몇 동료들과 풍경을 그렸는데 이들은 손응성, 이의주, 임호, 장리석 천칠봉 등이다. 변시지는 몸이 불편했던 관계로 도시 속 자연이며 화구를 쉽게 가지고 다닐 수 있는 고궁 특히, 덕수궁 비원을 선호했다. 덕수궁 비원을 찾았던 이들을 가리켜 미술평론가 오광수는 속칭 비원파라고 칭했는데, 그로부터 그들을 하나의 유파처럼 부르게 되었다.
당시 변시지는 매우 충실한 사실주의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 세필의 터치가 매우 섬세하여 마치 나뭇잎을 숫자 세듯이 그려나간 듯 했다. 향수를 느끼다가 고국에 돌아온 탓일까? 물빛은 고요하고 그 물에 어리는 애련정의 자태가 매우 곱다. 적막이 흐르고 나무를 처음 본 듯이 어름 쓸며 조심조심 숨을 죽인 표현이 눈에 띈다. 이번 변시지 타계 10주기 특별전에 <애련정>이 바로 그런 터치의 유형이었다. 이 <애련정>은 일본 광풍회 출품작이었다.
돌아온 제주에서 고졸미(古拙美)를 찾다. 변시지는 1975년 제주도로 귀향한다. 생전에 선생은 제주 공항을 내리는 순간 세상은 온통 아열대의 태양 아래 노랗게 보였다고 했다. 변시지는 1973년 제주대학교 사범대학에 신설된 미술교육과 서양화 강사로 발령받으면서 본격적인 고향 제주의 풍광과 마주할 수 있었다. 몇 년 정도의 기억밖에 없는 고향을 체험하듯, 출장 가듯 가뿐하게 내려온 것이나 처음 생각과 다르게 일생을 제주에서 마감할 운명적인 시작이었다.
고향, 변방의 섬, 한라산과 바다! 그의 영혼에서 녹색과 파란색이 황토색으로 보일 즈음 비원의 풍경색들이 봄눈 녹듯이 사라지고 있었다. 황토색으로의 침잠이었다. 감각은 환경에 감응하고, 감정은 삶에 따라 조정된다. 삶에서 느끼는 모든 것들은 새로운 감각 작용을 일깨우면서 대상을 다르게 보게 한다. 그래서 제주에서 찾은 것이 바로 고졸미이며 아무나 그릴 수 있다고 믿는 서투름이었다. 단조롭고 투박하며, 제주미의 생명력을 표현하는 거치름이었다. 어쩌면 오랫동안 잊었던 무의식의 심연에 본인도 알아채지 못한 진정한 야성의 미가 녹아 있었는지도 모른다.
제주는 모든 것이 거친 만큼 낯설었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 꿈틀거리는 원초적 기억과 후려치던 비바람의 기억이 깨어나고, 초가와 눌을 스치는 바람 소리가 귓가를 간질일 때, 그가 그리는 섬의 형태는 커다란 동작으로 바람을 향해서 엎드려 있었다.
10주기 특별전 지난 11월 28일부터 변시지 작고 10주년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29점으로 선보이는 변시지 특별전은 단출한 전시지만 관련 기관과 개인 소장가들의 작품들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새롭다. 요즘 한창 유행하는 미디어 아트로 새롭게 보는 변시지의 작품을 감상하는 맛도 신선하다.
새삼스럽게 지난 시간을 회고해보니 변시지에 대한 기운이 점점 쇠퇴해가는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시대가 변화고 환경이 변하면, 생각도 미의식도 변하는 것을 빨리 알아야만 한다. 미래에 화가가 있을 자리와 설 자리를 정해야 하는 것이다. 앞으로 점점 더 영상화 될 것이 분명하다. 세상이 영상 네트워크로 통하는 시대가 되었고 또 대중이 원하니 새로운 시각의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
변시지 10주기 기당미술관 특별전 <변시지, 그림과 함께 기억되다>
전시기간 : 2023. 11. 28 ~ 2024. 1. 28, 장소:서귀포시기당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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