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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매거진/김유정의 제주문화 이야기 '길 가는 그대의 물음'

아름다움들을 손이 닿는 데로 마음이 가는 데로

제주한라병원 2023. 9. 25. 10:43

 

김유정의 길가는 그대의 물음

올레의 화가 김택화 ()

 

아름다움들을 손이 닿는 데로 마음이 가는 데로

 

 

2023년은 김택화 화백이 돌아가신지 17년째가 되는 날이다. 세월의 빠른 흐름에 무상함을 느끼는 시간, 먼저 떠나 고인의 명복을 빌면서 그가 제주에 남긴 예술혼을 새겨보고자 한다.

 

김택화는 천성이 화가라는 이름에 걸 맞는 인물이었고 제주에서는 택화화실’, ‘택화풍이라고 그를 지칭하던 대명사로 그의 스타일이 대변 되었다. 언제라도 떠오르는 그의 첫 인상은 그림이 곧 그였다는 생각이다. 아담한 키에 평소 챙이 없는 모자를 즐겨 쓰고 말을 매우 적게 하면서 빙긋 웃기만 하는 스타일은 모르는 누가 봐도 딱 첫 눈에 화가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김택화는 처음이 많은 화가 김택화에게 처음의 의미는 제주인이라는 특정 장소성(고향)에 기반하면서 처음의 시간성(언제)이 어디서, 어떤 과정으로 이루어졌느냐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제주미술인으로서 김택화가 처음 시도한 미술활동 네 가지를 정리하면, 제주 극장 간판(김택화, 고영만 공동), 제주 추상화가, 상품 디자인, 올레를 처음 그린 화가로 처음의 의미가 부여된다.

 

 

 

중학생 신분으로 처음 극장 간판을 그리다 1950년대 한국전쟁기 시기에 김택화는 오현중학교를 다녔고, 고영만은 제주중학교를 다녔지만 서로 친구로 지내면서 사라봉, 용두암 등 제주시 곳곳에 스케치를 다녔다. 당시만 해도 배고픈 시절이고 더구나 중학생에게 돈이 있을 턱이 없었다. 마침 현대극장으로부터 극장 간판을 그려달라는 제의를 받았다.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이 귀한 시대였고 약간의 수고비를 준다는 말에 솔깃한 둘은 합작으로 영화 포스터(칭기즈칸)를 그리게 되었다.

 

먼저 고영만이 칭기즈칸 얼굴과 싸움 장면을 그리면 김택화는 남겨둔 빈 공간에 새로 글씨로 크게 성길사한이라고 썼다. 중학생이 극장 간판을 그리게 된 것은 간판을 그리던 육지 사람이 다른 사정으로 자리를 비우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둘은 많은 시간을 같이 했으나 김택화는 서울로 떠나게 되었고, 떠나기 전 1957814일부터 20일까지 일주일 동안 제주시 오아시스 다방에서 2인전을 열며 다시 만날 날을 기약했다.

 

 

 

처음으로 추상화를 그리고 특선으로 선정 고영만은 중학교를 졸업하여 제주 사범학교로 진학하고, 김택화는 형님이 체신청에서 근무하는 서울로 가서 전보 배달로 고학을 하며 홍익대학교에 다녔다. 누구보다 부지런했던 김택화는 아침 일찍 다른 학생들이 등교하기 전에 늘 뎃생실에서 그림을 그리는 학생이었다. 196222세의 김택화는 대학교 2학년생이었다. 당시 11회째를 맞은 국전에서 김택화는 추상화 작품<작품 7>을 출품하여 특선을 받았다. 당시의 회화부문 특선은 모두 23명이었고 우연처럼 제주와 연관된 사람들이 있었다. 김택화의 스승 홍종명, 현재 저지 현대미술관에 전시관이 마련돼 있는 박광진, 전 제주대 교수 강길원이 그들이다. 심사위원은 15명이었고 이들 중 김환기, 박수근, 장리석 등이 있었다.

 

1962년의 미술계 이슈는 매우 뜨거웠는데 대표적인 것이 당시 진보적인 종합지 사상계에서 국전을 새롭게 재조명한 것이었다. 이름하여 국전 선외선이다. 이 국전 선외선1949년부터 시작된 국전의 공정성을 재점검하기 위해 박정희 군사쿠데타 이듬해인 1962년 국전 11회부터 처음 시작한 것이다. 이전 국전이 10회를 넘기면서 많은 비리가 노출돼 미술계에 대한 불신 풍조가 팽배해지자 경각심을 심어주기 위한 상징으로 수상작을 제대로 평가해보자고 마련한 심사였다. 당시사상계에서 내세운 심사위원은 조각가 백문기, 서양화가 박서보, 미술평론가 이경성, 동양화가 박래현, 서양화가 김영주 등 5명이었다. 심사 방식은 이들 5명이 각자 좋다고 생각하는 작품 1점을 골라 평을 하는 것이었다. 김택화의 <작품 7)은 심사위원 박서보에게 채택되어 작품 추천평을 받을 수 있었다.

 

 

[ 추 천 평 ]
김택화의 <작품 7>을 나는 기꺼이 추천한다. 흔히 빠지기 쉬운 추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의 핵을 이루는 것은 바로 멍한 점, 이것이 그의 예술 내용을 형성한다. 외향적 발산보다는 내향적 집념형. 하나 흠이 있다면 긴박감이 허술하다고나 할까. 22세의 작품치고는 그 세계가 놀랄 만큼 성숙하다. - 심사위원 서양화가 박서보 -

 

 

제주의 삶이 엿보여 김택화의 <작품 7>은 뜨거운 추상이라고 하여 서정적인 추상을 말하는 것이다. 짙은 갈옷의 색이 화산암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화면 중심을 비켜 위와 옆으로 약간 치우쳐 어두운 색으로 덧나듯 굵은 선이 흐르고 중간 상하로 그어진 선 사이로 발색된 노란계열의 색이 은은하다. 이 작품은 매우 차분하여 굳은 화산 대지로도 보이고 완고하고 뚝심 있게 묵시(默視)로 세상을 보는 듯하다. 무거운 기운이 내려앉아서 우리에게 불편한 마음을 전해준다. 제주로부터 전해지는 암울한 마음이 오래도록 응고된 채 남아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당시에 가난에 허덕이던 그의 삶도 역시 그렇고 …….

 

 

김택화 생전의 모습

 

종합문예지 사상계, 1962년 11월호

 

대학생 때 그린 줄리앙 메지티 뎃생 종이에 목탄 1962년

 

김택화 제11회 국전 특서 작품7캔버스에 유채, 100호, 1962김택화미술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