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민관 임형수 제주목사를 찾아서
문영택 (질토래비 이사장․귤림서원 원장)
제주백성을 위한 아름다운 길을 걸은 임형수 목사의 흔적을 찾아 한경면 고산리로 향했다. 유네스코에 등재된 세계지질공원이자 화산학의 교과서라 불리는 수월봉과 엉알 해안을 비롯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신석기 선사인(先史人)이 살았던 자구네 뜬밭 등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경면 고산리에는 수월봉 엉알 해안에 있는 갱도와 참호는, 미군의 침공에 대비하여 바다로 직접 돌격하는 일본군 자살특공대 보트와 탄약을 보관했던 곳이자 지휘소가 있던 유적이다. 18,000년 된 분화구를 숨긴 바다와 다양한 볼거리를 품고 있는 차귀도에는 소래기(매) 동산과 볼래기 동산, 그리고 설문대할망 아들 오백장군의 막내바위도 있다.
옛 차귀현 마을인 고산리 가름(중심지)에는 제주도 방어망 9진성 중 하나인 차귀진성 터가 남아있고, 자구내 포구에는 문화재로 지정된 오래된 등대 도대불도 있다. 당산봉(차귀악)에는 제주도 3대 국당(國堂)이라 알려진 차귀당과 제주 25봉수대의 하나인 당산봉수 터도 있다.
지석묘로 여겨지는 커다란 바위유적 등 다양한 역사문화를 품은 당산봉을 수차례 답사하러 다니며 자주 본 안내 표석이 바로 ‘제74대 제주목사 금호 임형수 숭모원’이다. 숭모원이란 임형수(1514~1547) 제주목사 탄생 500주년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입도조(임형수 목사 큰아들 임구) 묘역 일대를 성역화하여 붙인 이름이다.
슬프지만 기억해야 할 역사문화의 길 임형수 목사를 찾아가는 길은 권력남용으로 점철된 역사문화를 만나기도 하는, 슬프지만 다시 기억해야 할 소중한 역사문화의 길이다. 전라도 나주 출신으로 호가 금호인 임형수는 1545년(인종1년) 문정왕후의 오라비이자 소윤인 윤형원 등이 벌인 을사사화로 홍문관 부제학에서 좌천되어 제주목사로 부임하나 다음해 파직된다.
이어 2년 뒤에는 양재역 벽사사건(정미사화)의 모함에 연루되어 윤형원 일파에게 대윤 윤임의 일당으로 몰려 문정왕후에 의해 사사되니, 그의 나이 고작 34세였다. 죽음 직전 임형수가 아들에게 “배우지 아니하면 무식하니 배우기는 하되 과거에 응시하지 말라.”라고 말하고 짐주(鴆酒)인 사약을 여러 번 마셨으나 죽어지지 않자 손수 목매 자결한다.
그의 사후 20년이 지난 1567년(명종22년) 신원된 임형수는 1868년 이조판서로도 증직된다. 명환(名宦)으로 알려진 임형수는 1702년 전남 나주의 송제서원과, 1850년 장인식 제주목사에 의해 귤림서원 사당이던 영혜사에도 배향된다. 임형수 제주목사는 송사를 엄정하게 행하고 민폐를 없애려 하였으며, 특히 교육기관인 동재인 김녕정사와 서재인 월계정사를 설립하였다.
임형수 목사의 시, 관덕정 동방18현으로 알려진 이황과 김인후 등과도 교류하였던 임형수 목사가 엮은「금호유고」에는 제주와 관련된 여러 글이 실려 있다. 그중 ‘관덕정(觀德亭 濟州)’이란 시를 결언을 대신하여 소개한다.
曾修文德又論兵 어려서부터 글과 덕을 쌓고 병법도 논하며 長念民間苦樂情 백성의 아픔과 기쁨에 정 붙여 깊이 생각 하였네 聽訟常懷夫子語 송사를 들을 때 늘 공자님 말씀 품고 典形每效伯夷淸 법을 다스릴 때는 백이의 청아함을 본받는다네 觀人才否御帿處 사람의 재주를 알려면 말 타기와 활쏘기를 살피고 審政正邪絃管聲 정사의 올바름과 사악함을 심판할 때면, 현의 어울림처럼 양편의 소리를 듣는다네 突兀高亭今古在 우뚝 솟은 정자(관덕정)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인데 幾經仁牧享治平 (제주백성들은) 몇 번이나 어진 목사 만나 좋은 세상 만났을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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