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라순력도로 보는 경로잔치
문영택 (질토래비 이사장․귤림서원 원장)
고향에서 베풀어진 경로잔치에 갔었다. 최근 마을사업으로 다시 조직된 걸궁패와 초청된 소리패가 분위기를 주도하니 어르신들도 이내 흥겨운 한마당에 빠져들었다. 흥은 전염 되고 돌림 된다는 말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고향의 흥겨운 경로잔치를 떠올리며 과거로의 여행을 떠나본다.
그 옛날 제주 목사가 주관하는 경로잔치가 제주목․정의현․대정현에서 연례적으로 행해졌다. 80세 이상의 어르신들이 참여한 조선시대 제주에서의 경로잔치를 탐라순력도를 통해 살펴보자.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 1979년 국가보물로 지정된 탐라순력도는 경북 영천 출신의 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이 1702년(숙종 28) 제주목사로 부임하여 순력한 일정을 41개 그림으로 그린 화첩이다. 1998년, 제주시는 그동안 이형상의 후손이 보관하고 있던 탐라순력도를 매입하여 관리하고 있다. 제주목사는 전라도 관찰사를 대행하여 매년 봄과 가을 두 차례에 걸쳐 제주 3읍을 순력하곤 했는데, 이형상 목사는 1702년 10월 29일부터 11월 19일까지 21일 동안 순력을 실시했다.
그리고 제주도의 역사․풍속․자연 등에 대해 화공 김남길(金南吉)로 하여금 꼼꼼히 그리도록 했다. 탐라순력도는 지방에서 그려졌음에도 화공의 이름이 남아 있고 그 화필의 수준이 중앙 화원들이 그린 의궤도를 능가하고 있다는 평판을 받을 정도로 진귀하고 보배로운 그림첩이다.
장수의 섬, 관례화된 노인잔치 순력(巡歷)은 본래 관찰사가 각 고을을 순회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전라도관찰사가 매년 2차례 제주에 내려와 3읍을 순력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시대 상황이었다. 그래서 전라도관찰사는 자신의 임무 중 일부를 제주목사에게 위임하였는데, 순력 역시 그 중 하나였다. 탐라순력도는 이형상이 또한 기록한 ‘남환박물’과 함께 제주의 옛 실상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 받고 있다.
당시의 문장가들은 삼신산의 하나인 영주산이 위치한 제주도를 인다수고(人多壽考) 즉, 장수하는 사람이 많은 섬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중 이원진(李元鎭)의 ‘탐라지(耽羅志)’에는 그 이유를 “제주 섬의 한 가운데 한라산이 있어, 남쪽 큰 바다의 독기는 산에 막히고, 북쪽에서 불어오는 찬 기운은 더운 습기와 열기를 몰아내기 때문이다.”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한라산 남쪽에 비하여 북쪽이 더욱 장수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어 있음도 덧붙이고 있다. 봄·가을 동쪽 하늘에 나타나는 노인성(老人星)을 보면 장수한다는 속설이 전해오는데, 게다가 제주에선 한라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별이 노인성이라 도민들 중에 장수하는 자가 많다는 것이다.
노인 공경이라는 정신적 가치 조선왕조의 수령들은 노인들을 초청하여 경로의 잔치를 베푸는 양로연(養老宴)을 우선 하는 것이 중요한 직분이었다. 양로연을 베풀 때에는 귀하고 천함을 가리지 않고 노인들의 좋은 말을 들어 행정에도 반영했다. 노인을 공경하고 어진 이을 존경하는 것은 왕조를 다스리는 근본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제주목사 순력 시에 양로 잔치는 거의 관례화되어 있었다.
탐라순력도는 갈수록 희미해져가는 노인 공경이라는 정신적 가치와 위정자의 바른 자세를 엿볼 수 있는 양로연의 모습을 예술적 가치와 함께 잘 나타내고 있다.
사진설명 1. 제주양로(濟州養老) 제주목에 거주하는 80세 이상의 어르신들을 모시고 제주목관아(상아) 동헌(東軒) 앞에서 행해지던 경로잔치를 그린 광경이다. 동헌 뜰을 중심으로 망경루(望京樓)·마방(馬房)·귤림당(橘林堂)·애매헌(愛梅軒) 등의 모습도 보인다. 당시 제주목에 거주하는 어르신 중 80세 이상이 183인, 90세 이상이 23인, 100세 이상이 3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
사진설명 2. 정의양로(旌義養老) 정의현성 내의 건물 배치 상황도 상세히 보여주고 있는 그림이다. 경로잔치는 어사 등이 묵는 객관(客館) 앞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정의현에 거주하는 노인은 80세 이상이 17인, 90세 이상이 5인이다. |
사진설명 3. 대정양로(大靜養老) 대정현성에서의 경로잔치를 그렸는데, 멀리 단산과 산방산의 모습도 보인다. 당시 대정현에는 80세 이상의 노인 11인, 90세 이상의 노인 1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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