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제주건축가다] <19> 사이건축 정익수
제주는 자연과 도시문화를 공유하며 활용할 수 있는 곳
건축가 정익수 제주시에서 나고 자랐다. 정확하게는 제주 시내 중심으로 불리던 ‘성안’에서 살았다. 지금은 원도심이라 불린다. 성안에서도 탑동 인근에 살던 기억이 또렷하다고 그는 말한다. 서귀포 친구들 사이에서는 ‘시에따이(시에 사는 아이)’로 불렸다. 요즘은 모든 곳이 시(市)로 불리지만, 예전에는 그렇게 불리는 지역이 한정되어 있었다. 사이건축의 ‘사이’는 말 그대로 ‘무엇과 무엇의 사이’를 말하는 그 단어이다. 건축주가 없으면 건축가에게 일이 없다. 건축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일어나는 일이다. 당신과 나 사이, 공간과 공간의 사이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사이’를 내건 특별한 이유는 또 있다. 학창 시절 번호가 42번과 44번 사이를 오갔다. 숫자 ‘사십이(42)’ 역시 그냥 읽으면 ‘사이’가 된다. 그는 사이를 우리 곁에 존재하는 흔한 존재라고 본다. 세상을 살면서 너무 복잡하게 볼 일은 아니다. 머리가 아프면 밖에 나가 둘러보면 된다. 오름에 올라 바라보는 풍경을 좋아한다. 벚꽃이 필 때는 벚꽃 길을 걷고, 초여름엔 물회를 먹으러 서귀포로 향한다. 제주라는 환경을 오롯이 느끼고 존중하고자 한다. |
■ 제주의 풍토성이 살아 있는 공간을 꼽으라면 뭐가 있을까?
아니면 제주에서 끌리는 공간은 어디에 있고, 그 이유는 무엇인가.
개인적으로 의미 있는 지역이라 한다면 단연 어릴 적 집 앞에 무작정 펼쳐져 있던 탑동 바다와 현무암 돌밭이라고 할 수 있다. 친구들과 거친 돌밭 위를 다람쥐처럼 재빠르게 뛰어다니며 그 사이에 있는 보말을 채취하고, 무더운 햇빛에 더위를 식히기 위해 바다로 몸을 던져 수영을 하고 있노라면 저 동네 어귀에서 들려오는 어머님의 저녁식사 알림소리로 하루 일과를 정리하던 기억이 난다. 예전에 어른들은 “탑동에서 보말 까먹는 소리하고 앉아 있다.”는 말을 자주하곤 했다. 상대방이 황량한 이야기를 했을 경우에 썼던 관용적 표현이다. 지금은 매립되어 그때의 풍경은 사라졌지만, 기억이 남는 추억의 장소이다.
제주는 내 삶과 일상이 녹여진 그야말로 내 정체성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가끔 제주적인 소재와 디자인을 의뢰하시는 분들에게는 나의 무의식 속에 묻혀있던 정서가 반영된 디자인을 하는 경우가 있다.
■ 제주 풍토를 가장 잘 이해한 건축물을 꼽는다면 뭐가 있을까.
이타미 준이 설계한 포도호텔을 꼽고 싶다. 제주 지형에 자연스럽게 풀어헤친 갈대들 사이에 초가집을 연상케 하는 지붕 구조는 현대적으로 재해석했지만 자연과 전혀 이질감 없으며 동떨어져 보이지도 않고, 어우러짐이 “건축물 또한 자연으로 승화시킬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들게 한다.
■ 지역성이란 무엇이며,
제주에 어울리는 지역성을 뭐라고 정의 내릴 수 있을까.
정말로 어려운 질문이다. 나는 어떤 것이든 고정관념을 추구하지 않는 스타일이다. 서울에서 잠깐 살기는 했으나 타 지역에서 오래 살아본 적이 없다. 관련 업무로 서울에서 몇 개월 지내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 본 서울 사람들의 삶은 ‘너무 빡빡하다’라는 기억뿐이다.
제주는 여유와 느림의 미학이 곳곳에 묻어 있는 곳이다. 남들이 빠르게 가는 모습을 보며 나는 목표 없이 빠름을 좇지 말자고 다짐했다. 넓고 아름다운 자연 풍경을 보며 목적을 정확히 알고 천천히 정을 꽂고 가는 삶이야말로 내가 지향하는 삶의 라이프스타일이다. 인생은 속도가 아닌 방향이기 때문이다. 제주 또한 시대와 자연이 함께 진화를 거쳐 현대와 과거 그리고 자연이 공존하는 지금의 제주의 모습이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제주의 지역성이라 본다.
■ 설계 아이디어는 어디에서 얻는가.
일반적으로 건축주와 잦은 미팅을 통해 많은 의견을 듣고 수정·보완 단계를 거친다. 건축주들은 그전에 살았던 집에서 생활하며 불편했던 부분이나 추가했으면 하는 부분들을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의견을 적극 반영하고자 한다. 그리고 다양한 사물들을 보며 아이디어를 구상하기도 하고 자연을 통해 건축이 보이기도 하므로 사람과의 관계를 생각하면서 건축의 방향성을 구상하기도 한다.
■ 제주도라는 땅은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보나.
제주도라는 땅을 이야기한다면 어느 곳을 콕 집기가 힘들 정도로 풍경이 좋은 곳이 매우 많다. 오름을 둘러보며 풍경에 매료되기도 하고, 벚꽃이 피면 벚꽃 길을 걷고, 초여름이 되면 자리물회를 먹으러 무조건 서귀포로 향한다. 제주의 땅은 문화, 자연 생태계, 도시문화가 서로 공유하면서 이 모든 점을 골고루 활용할 수 있는 곳이다. 도시의 편리함과 바로 나가서 힐링할 수 있는 자연환경이 도처에 깔려 있다. 이 가치를 알아보고 중국이나 외지에서 땅 가격을 올리면서까지 집을 지으려고 하는 게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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