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한라병원

이명아명, 환자의 생명과 건강을 자신의 몸처럼 돌본다

병원매거진/이태훈세계여행

출애굽기부터 등장하는 ‘성서의 땅’

제주한라병원 2022. 4. 12. 09:23

 

요르단 암만

 

7개의 언덕을 중심으로 형성돼 지금은 인구 4백만의 도시

5천 년 역사 자랑하는 암만성은 고고학적으로 소중한 유산

 

 

요르단의 암만은 고대 ‘암몬 왕국’의 후예들이 이룬 땅이다. 기원전 10세기부터 성서에 등장하는 암몬족의 중심지였던 ‘리바트 암몬’이 바로 오늘날의 암만이다. 요르단의 수도로서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이지만, 구약성서에 이스라엘 다음으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지역이 바로 암만이다. 모세의 출애굽기부터 등장하는 암만은 ‘암몬’, ‘모압’, ‘에돔 왕국’ 등과 함께 성서의 땅이기도 하다. 사해로 흘러 들어가는 요단강 동쪽, 해발 800m에 자리한 고대 도시 암만은 1921년 트랜스-요르단 시절 요르단의 초대 왕인 압둘라 하심이 수도로 정하면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도시는 본래 7개의 언덕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는데, 현재는 20여 개의 언덕을 따라 요르단의 인구 40%인 약 4백만 명이 사는 현대도시로 변모했다.

예로부터 암만은 이슬람의 성지인 사우디아라비아 메카와 이스라엘 예루살렘으로 가는 순례자들이 머물다 가는 중간 숙박 도시로 발달했다. 좀 더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스라엘 왕국의 두 번째 왕, 다윗의 명령으로 그의 충신이자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야 장군이 ‘암몬 전투’에서 전사한 장소로도 유명하다. 또한, 헬레니즘 시대 알렉산더 대왕의 부하였던 프톨레마이오스 1세인 소테르가 이집트에 새로운 왕조를 열고, 팔레스타인 지역을 다스릴 때 암만도 포함되었다. 그가 죽은 후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기원전 283년부터 기원전 246년까지 통치)가 암만을 재건하고 자신의 이름 따 ‘필라델피아’로 불렀다. 기원전 63년에는 요단강 동부에 있는 그리스 계통의 연합도시, 데카 폴리스(Decapolis_‘10개의 도시’라는 뜻)에 편입됐다가, 유다 왕국의 헤롯왕으로부터 지배를 받았다. 106년에는 로마 황제 트랴얀이 이곳을 로마 영토로 편입시킨 뒤, 도로를 깔고 아라비아반도와 이집트로 가는 전진기지로 삼았다. 이때부터 로마군이 대거 유입되면서 도시는 극장, 헤라클레스 신전, 목욕탕, 관개시설 등 다양한 로마식의 건축물이 하나둘씩 생겨나면서 번영을 누렸다.

이처럼 외세의 침략을 많이 받았던 암만은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인구의 수가 수십만 명밖에 안 될 만큼 작은 도시에 불과했다. 하지만 1946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후 팔레스타인 난민이 들어오면서부터 인구의 수가 가히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실제로 암만은 아랍인이 인구의 40%, 팔레스타인이 60%를 차지한다.

고대 유적지를 제외하면 암만은 아직 현대화와 산업화가 덜 된 도시라서 여행지가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 요르단을 찾은 여행자들은 로마 유적이 많은 제라시, 나바테아 왕국이 있었던 페트라, 지구상에서 가장 낮은 바다이자 죽음의 바다인 사해, 예수 그리스도가 세례를 받았던 베다니 등을 더 많이 찾는다.

굽이치는 언덕을 따라 여러 개의 도시가 형성된 암만. 그중에서도 해발 850m에 있는 암만성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요르단의 대표적인 유적지이자 관광지이다. 대략 5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암만성은 현지 언어로 ‘자발 알 깔라아(Jebel Al-Qalaa_시타텔)’라고 부르고, 로마 식민시대 때 헤롯왕이 헤라클레스를 위해 봉헌한 신전과 6세기 비잔틴 시대의 교회 터, 이슬람 최초의 통일 왕조인 우마이야 왕조가 건축한 성 등 고고학적으로 매우 소중한 유산을 가진 역사적인 현장이다. 이 중에서 로마 제국 16대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때 만들어진 헤라클레스 신전은 거의 다 파괴되고 돌기둥만 남아 있다. 신전 남쪽에서 발아래로 바라다보면 로마 원형극장과 언덕을 따라 빼곡히 들어선 노란색의 집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신전 북쪽으로 가면 1951년에 세워진 고고학 박물관이 나오는데, 박물관에는 선사시대 때부터 출토된 다양한 유물들을 시대별로 전시하고 있다.

 

2세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 때 건축된 헤라클레스 신전.
앙상하게 기둥만 남은 비잔틴 교회 터.

 

사실 암만의 로마 유적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요르단의 제라시만큼 보존 상태나 유물이 많은 것은 아니다. 거의 폐허가 된 성터와 신전의 돌기둥 몇 개가 전부이지만, 유서 깊은 역사의 현장이기에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남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세월의 먼지가 켜켜이 쌓인 암만성을 이곳저곳 거닐다 보면 이스라엘 왕국의 우리야 장군과 암몬족의 처절한 전투가 생각난다. 구약성경 ‘사무엘의 하권 11장’에 나오는 이야기로, 다윗왕의 충성스러운 신하였던 우리야는 자신의 아내 밧세바를 다윗에게 빼앗기고 그의 계략에 의해 전쟁에서 죽어야만 했다. 성서에 나오는 이 이야기는 많은 예술가를 통해 그림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그중에서도 프랑스 루브르 미술관에서 소장된 렘브란트의 ‘목욕하는 밧세바(1654년)’가 제일 유명하다. 이 그림 속에서 옷을 벗은 밧세바는 오른손에 편지들 들고, 시종이 몸을 깨끗하게 닦아주는 모습이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너무나 어둡고 슬픔에 잠겨 있다. 남편을 구하기 위해 마지 못해 다윗왕의 부름을 받고 궁으로 들어가는 절망적인 순간을 렘브란트는 밧세바의 눈빛을 통해 그날의 심정을 표현하였다.

이스라엘 왕국의 두 번째 왕, 다윗은 ‘간음하지 말라’라는 십계명을 어기고 우리야 장군의 아내 밧세바에게 편지를 보내 왕궁으로 초대해 사랑을 나눴다. 몇 개월 후 밧세바가 임신하자 다윗은 자신의 잘못을 들키지 않으려고 암몬 전투에서 열심히 싸우고 있던 우리야를 불러들여 밧세바와 함께 시간을 보내라고 명령하였다. 하지만 우리야는 전쟁터에 싸우는 부하들을 생각해 집으로 들어가지 않자, 다윗왕은 계략을 써서 우리야를 다시 전쟁터로 보냈다. 심지어 다윗은 요압 사령관에게 그를 맨 앞에서 싸우게 하도록 은밀한 편지까지 보냈다. 결국, 우리야는 암몬 전투 최전선에서 암몬족과 혈투를 벌이다가 전사하고 말았다. 그 후 밧세바는 다윗의 아내가 되었지만, 결혼 전에 임신한 아들은 낳자마자 죽었고, 다윗과 밧세바는 참회한 뒤 두 번째 아들 솔로몬을 낳았다.

우리야 장군과 밧세바 그리고 다윗왕의 이야기를 생각하다 보면 암만성 발아래로 로마 원형극장이 눈에 들어온다. 이 극장은 2세기에 세워진 것으로 사암인 바위산을 깎은 뒤 돌을 채워 모양을 만들었다고 한다. 약 6,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원형극장은 보존이 잘 돼 있어서 여전히 공연장으로도 사용한다. 이처럼 암만에는 황폐한 유적만 남았지만, 그 속에는 수많은 신화와 전설 같은 이야기가 스며 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유적지를 찾고 유구한 역사 속에 묻혀 있는 진실과 전설을 통해 또 다른 여행을 꿈꾸게 된다.

 

구약성서에 이스라엘 다음으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암만.
암만은 ‘암몬’, ‘모압’, ‘에돔 왕국’ 등과 함께 성서의 땅이다.
우마이야 이슬람 왕조 때 건축된 왕궁.
루브르 미술관에서 소장된 렘브란트의 ‘목욕하는 밧세바(1654년)’
1665년 렘브란트가 그린 '다윗왕과 우리야 장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