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에서 제일 먼저 가우디의 흔적을 만나기 위해서는 카사 비센스로 가야 한다. 1878년에 건축을 시작해 4년 만에 완성한 카사 비센스는 카사 밀라와 카사 바트요에 이어 2005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뒤늦게 선정된 일반 주택이다. 특히 1878년에는 가우디가 스물여섯 살이 된 해로 ‘페피타’라 불리는 호세파 모레우와 사랑에 빠졌고, 그의 평생 후원자가 되는 에우세비 구엘과 처음으로 인연을 맺었다.
카사 비센스는 가우디의 처녀작으로 타일 제조업자인 마누엘 비센스 몬타네르를 위해 지은 집이라 타일과 벽돌 미학의 정수를 보여 준다. 또한, 스페인 특유의 무데하르양식(13~16세기에 스페인에서 발달한 이슬람풍의 그리스도교 건축양식)이 돋보이고, 이슬람 사원의 첨탑처럼 망루와 옥상에 누각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가우디의 일반 주택 중 두 번째로 건축된 카사 바트요는 외진 골목길에 있는 카사 비센스와 달리 카탈루냐 광장에서 멀지 않아 언제나 많은 사람으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건물 밖으로 나온 마스크 형상의 발코니가 인상적인 이 건물은, 가우디가 구엘 공원을 짓고 있을 때 직물업자로 성공한 바트요 가문으로부터 요청받아 지은 주택이다. 원래 이 자리에는 1875년에 건축된 신고전주의 양식의 건물이 있었는데, 이를 헐고 1904년부터 1906년까지 건축하였다. 바다를 모티브로 해 건물 외벽은 색색의 유리 모자이크로 장식하였고, 내부는 깊숙한 바다, 즉 해저의 풍경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하다. 마치 용궁에 들어온 것처럼 물결 모양과 독특한 곡선들이 어우러져 안데르센의 동화에서나 나올 것 같은 분위기가 연출된다. 그리고 카사 바트요 맞은편에는 곡선의 미학을 보여 주는 카사 밀라가 있다. 잘린 돌을 그대로 쌓아 올려 건축한 카사 밀라는 철저하게 직선을 배제하고 부드러운 곡선을 주제로 지은 것이다.
산에서 영감을 받은 가우디는 사람의 형상을 한 옥상의 굴뚝을 산봉우리로 표현하였고, 건물 외벽은 부드러운 산 주름을 닮아 곡선이 주를 이룬다. 가우디는 “직선은 인간의 선이고, 곡선은 신의 선이다. 기둥은 나무줄기나 그루터기와 같고, 지붕은 산등성이와 산비탈과 같다”라 말했다. 그의 말이 그대로 투영된 개인 주택이 바로 카사 밀라인 것이다.
가우디의 세계문화유산 중에서 3채의 주택을 둘러보았다면 이제는, 그의 대표작인 구엘 공원과 미완성의 성 가족성당을 만날 차례이다. 우선 바르셀로나 구시가지에서 가장 북쪽에 자리한 구엘 공원은 가파른 몬타나 펠라다 언덕에 조성되었다. 원래 이곳은 나무와 풀이 거의 없는 바위산이자 민둥산이었다. 이런 험준한 지역에 가우디의 후원자인 구엘이 신도시 계획의 하나로 정원이 있는 대단지의 주택을 건설하고자 하였다. 그 당시 영국을 비롯한 유럽은 정원을 가진 주택이 유행했는데, 이를 바탕으로 구엘 공원 안에 62채의 주택이 짓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바르셀로나 시내와 멀리 떨어져 있어 아무도 분양에 참여하지 않았고, 분양 목적으로 지은 2채 중 한 채에 가우디가 살았고, 다른 한 채는 분양에는 구엘이 살았다. 14년 동안 분양을 했지만, 결국 미분양과 자금 등의 문제로 공사가 중단되었고 그 자리에 지금처럼 공원이 들어서게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구시가지 중심에 우뚝 솟아오른 거대한 첨탑이 인상적인 사그라다 파밀리아는 1866년에 처음 기획되었다. 산업혁명으로 인해 기계화와 근대화로 인간소외 현상이 일어나자, 한 출판업자가 인간의 마음을 정화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신의 집’ 즉 ‘성당’뿐이고, 가족들이 성당에 모여 기도할 수 있게 의미 있는 성당을 짓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성당의 주제는 예수와 마리아 그리고 요셉 등 세 사람의 성스러운 가족과 화목한 가족이다.
가우디가 이 성당을 처음부터 맡은 것은 아니다. 1882년 설계를 부탁받은 건축가 빌랴르가 제자와 50여 명의 노동자가 무보수로 일을 하다가 그만두자, 1883년부터 가우디가 성 가족성당 건축에 본격적으로 참여하면서 40년 동안 결혼도 하지 않고 오롯이 성당을 위해 자신의 모든 열정을 바쳤다.
성당의 구조는 크게 탄생, 영광, 수난 등 3개의 큰 파사드(건축물의 주된 출입구가 있는 정면)로 이뤄져 있고, 각각의 파사드에는 100m가 넘는 4개의 첨탑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다. 그러나 가우디가 살아있을 때 건축된 것은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는 ‘탄생의 파사드’뿐이고, 나머지는 그가 죽은 뒤에 완성되었다.
1925년부터는 구엘 공원에 있는 집에서 나와 성당에 머물며 신으로부터 받은 재능을 사그라다 파밀리아 건축에만 쏟아붓는다. 하지만 성당의 재정 문제로 인해 건축 시기는 늦어졌고, 1926년 6월 7일 성당 미사를 마치고 집으로 가던 중 가우디는 전차에 부딪혀 치명상을 입는다. 전차 기관사는 가우디의 행색이 너무 남루해 그냥 노숙자 정도로 생각하고 지나쳐 버렸다. 현장에 있는 사람들이 택시를 잡아 응급실로 갔지만, 몇몇 병원에서도 노숙자로 생각해 치료를 거부했다. 결국, 가우디는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6월 10일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 후 기관사는 뺑소니로 구속되었고, 치료를 거부했던 병원은 유가족에 막대한 배상금을 지급했다. 그리고 6월 13일 바르셀로나의 시민들이 모인 가운데 사그라다 파밀리아에서 장례식이 치러졌고, 로마 교황청에서는 가우디의 열정에 감동하여 성당 지하 묘지에 안장되도록 허락했다.
부와 명예를 좇기보다는 자신이 좋아하는 건축에 인생을 모두 쏟아부은 안토니오 가우디. 그 결과 한 천재의 예술적 영혼이 담긴 건축물에 사람들은 열광하고, 그가 남긴 열정에 우리는 모두 존경을 표하면서 오늘도 어제처럼 가우디 건축물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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