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쓰는 제주 이야기 <39> 에밀 타케 신부②
제주도 온주밀감의 시작을 알린 ‘식물 학자’ 신부
전달에 이어 에밀 타케 신부 이야기를 이어간다. 타케 신부가 제주에 발령을 받은 건 1902년 4월 20일이다. 서귀포 하논본당 제3대 주임신부로 제주에 내려오게 됐다. 그가 제주에 온 시점은 천주교에 대한 분위기가 썩 좋지 않을 때였다. 이재수의 난으로 불리는 신축교안이 그가 부임하기 1년 전에 제주에서 발생한 터였다.
이재수의 난은 급속한 교세 확장에만 힘쓴 전임 신부들의 욕망의 결과이기도 했다. 하나의 종교가 지역에 뿌리를 내리려면 지역의 분위기를 존중해줘야 하는데, 당시 천주교는 그러지 못했다. 천주교의 교세 확장은 제주도의 풍습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에밀 타케 신부는 그런 시기에 발을 디뎠다. 그는 하논성당에 부임하자 서홍동의 홍로로 성당을 옮긴다. 어쩌면 신축교안으로 만신창이가 된 천주교를 새롭게 만들어보려는 구상이었는지도 모른다. 현재 홍로성당은 터만 남아 있으며, 지금은 면형의 집이 자리를 잡고 있다.
에밀 타케 신부의 생애를 잘 묘사한 책 <에밀 타케의 선물>을 들여다보면 그는 제주 식물학의 효시로 기록된다. 그는 식물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으나 제주에서만큼은 식물학자였다. 그에게 영감을 준 이는 일본에서 활동하던 포리 신부였다. 포리 신부는 네 차례 조선을 방문했고, 두 차례는 타케 신부와 만난 것으로 나온다. 단순한 며칠이 아니라, 포리 신부는 수개월을 제주에 머물며 타케 신부와 함께했다. 포리 신부가 그때 한반도에서 채집한 식물 대부분은 일본으로 건너갔고, 채집품은 유럽의 전문가들에 팔려 선교활동 자금으로 활용됐다고 한다. 포리 신부는 1911년엔 타케 신부에게서 왕벚나무를 받은 답례로 온주밀감 14그루를 보내기도 했다. 이때 보내온 온주밀감은 제주도 감귤산업의 종잣돈이 됐음은 물론이다.
일본에서 활동하던 포리 신부는 포교활동보다는 식물 연구에 더 치중했다. 타케 신부는 달랐다. 제주에서 지낸 13년의 생활 외에는 식물관의 연관성을 찾을 수 없다. 그는 제주에서 활동하며 7000점 이상의 한국 식물을 채집했는데, 그에게 식물 채집은 선교자금 확보라는 목적도 컸다.
“타케 신부는 마산과 진주에서 첫 선교를 할 때에도 제주도 하논에서 사목활동을 시작했을 때도 선교자금이 너무 부족했다. 타케 신부는 선교자금을 확보하는 방법으로 식물 채집을 시작했다가 점점 그 가치를 배우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포리 신부는 식물 채집이 전부였지만 타케 신부에게 식물 채집은 시한부였다. 타케 신부는 제주도를 떠나면서 식물 채집도 손을 놓았다.”(‘에밀 타케의 선물’ 중에서)
타케 신부는 식물과의 인연 때문에 제주도에 온 게 아니었고, 당시 상황이 그를 식물학자로 활동하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때문에 왕벚나무의 가치도 알게 되었고, 온주밀감도 선물을 받은 것 아닌가.
<에밀 타케의 선물>이라는 책은 타케 신부의 활동을 말하지만, 책을 쓴 정홍규 신부는 제주의 진면목과 가치를 누누이 설명한다. 그에게 제주는 파괴대상이 아니라, 잘 지켜야 하는 보물이다. 정홍규 신부가 책에서 쓴 이야기를 나눠보자.
“사람들이 제주도에 오는 이유는 제주도 돼지고기를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두가지, 생태와 영생 때문이다. 합치면 ‘생태영생’이다. 종교에서는 생태와 신앙을 따로 두고서 ‘영적인 공백’을 방치하고 있다. 생태계 파괴의 근본 원인은 우리 자신과 하느님 사이에 있는 세 겹의 관계의 장애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만들어내는 내외적인 불모지, 즉 쓰고 버리는 쓰레기 사회는 인간과 자연이 얼마나 하느님과 단절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우리 지구의 지속 불가능한 상황은 근본적으로는 인간과 자연의 심각한 단절 때문이다.”(‘에밀 타케의 선물’ 중에서)
제주도는 소중하다. 그렇게 말만 떠든다. 잘 보호해서 후세에 넘겨주자는 말만 무성하다. 대신에 우리는 자연을 마구 쓰기에만 혈안이 돼 있다. 자연을 소비하는 인간들이다. 정홍규 신부는 그런 우리들을 행해 자본의 축적만 생각하는 ‘생태 문맹자’라고 비판한다. 자연을 인간 중심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생태 위기가 오고 있다고 진단한다. 덧붙여 그는 인간 탐욕으로 제주도가 망가질 위기라고 말한다. 그런 날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 타케 신부가 포리 신부에게 선물로 받았다는 온주밀감은 지난 2019년에 고사했다. 서귀포 ‘민형의 집’에 심었던 그 나무는 고목으로 전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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