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그리기 위해 바이올린 연주자가 된 파울 클레
스위스 베른
덜컹거리는 기차를 타고 베른 중앙역에 발을 내디디면 고색창연한 중세풍의 건축물들이 세월의 흔적을 온몸으로 마주하며 오늘도 어제처럼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500여 년이 훌쩍 넘은 건축물에는 시민들과 함께한 삶의 궤적이 알알이 박혀있다.
◇ 11개의 분수가 인상적인 구시가지
1983년 스위스 최초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구시가지로 한 걸음 더 들어가면 유럽 특유의 고풍스러운 분위기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시계탑, 11개의 독특한 분수 등이 한 편의 영화처럼 눈 앞에 펼쳐진다. 오랜 시간에도 외관이 변하지 않아 도시 전체가 야외 박물관을 연상케 할 만큼 베른의 이미지는 그야말로 중세도시 그 자체이다. 특히 도시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장미정원에 서면 발아래로 아레강과 스위스 최대 성당인 베른 대성당이 힘찬 위상을 뽐낸다.
◇ 장미의 정원에서 내려다 본 베른의 야경
조용하고 품격 있는 도시를 유유자적하게 걷다 보면 수도의 인구가 13만 명밖에 안 돼 한번 놀라고, 이 작은 도시에 40여 개의 박물관이 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무엇보다 베른은 잘 알려진 화가 파울 클레의 영혼이 스며 있어 그를 좋아하는 팬들에게는 남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도시이다.
러시아의 칸딘스키와 함께 추상화의 대표적인 화가로 꼽히는 파울 클레는 베른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화가이다. 1879년 12월, 베른 교외에 있는 아주 작은 시골 마을인 뮌헨부흐제에서 태어난 클레는, 음악 교사였던 아버지와 성악가였던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7세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웠고, 11세 때부터 베른 교향악단의 바이올린 연주자로 활동할 만큼 음악적 재능이 탁월했다. 음악뿐만 아니라 소년 클레는 시도 잘 썼고, 그림도 잘 그렸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청년이 된 클레에게 선택의 순간이 찾아왔다. 바이올리니스트가 될 것인지 아니면 화가가 될 것인지. 음악을 전공한 부모님은 클레가 바이올린 전문 연주가가 되길 바랐다. 하지만 1914년 튀니지의 카이로우완을 다녀온 청년 클레는, 연주자가 아닌 화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음악가가 아닌 화가의 길을 걷게 된 이유는 미술에서 자신의 무한한 창조력을 최대한 발휘해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 수 있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클레가 음악가로서 모든 것을 포기한 것은 아니다. 피아니스트인 릴리 슈툼프와 결한 후에도 생계를 위해 부부가 함께 공연했고, 바이올리니스트로 연주 활동도 계속해 나갔다. 결과적으로 보면 클레의 선택은 적중했고, 자신의 신념대로 부단히 노력해 고전주의 음악에 충실한 ‘음악가’라는 칭호보다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추상화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좀 더 그의 예술세계를 만나기 위해서는 지난 2005년에 베른 외곽에 문을 연 ‘파울 클레 센터(원명 첸트룸 파울 클레_Zentrum Paul Klee)’로 가야 한다. 물결 모양의 독특한 외관을 자랑하는 파울 클레 센터는 베른 시민들이 그의 예술에 대한 오마주로 탄생하게 된 미술관이다.
61세까지 살다간 클레가 평생 그린 그림의 수가 9천여 점인데, 이 중에서 4천여 점이 파울 클레 센터가 소장하고 있다.
◇ 파울 크레의 작품 4천여 점을 소장한 파울 클레 센터
이탈리아 건축가 렌조 피아노에 의해 설계된 건물은 그의 작품만큼 추상적이고 독특하다. 현재 클레의 미술 전용관으로 사용되고 있지만, 음악, 공연, 댄스와 문화를 위한 다양한 플랫폼이 복합문화예술 공간이다. 그래도 이곳을 찾는 주된 이유는 클레의 작품을 감상하기 위해서이다. 클레의 작품 수가 워낙 많아 센터에서는 120~150 작품씩 주기적으로 변경하여 전시하고 있다. 어떤 작품을 만날지 모르지만, 그의 작품은 단순하면서 맑고 때로는 해학적이고 너무 추상적이라 이해가 되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러나 작품에 쏟은 그의 열정만큼은 똑같이 느낄 수 있다.
클레는 ”자신의 예술적 자양분이 음악“이라 했을 만큼 음악을 미술에 접목하려고 노력했다. 특히 1920년 이후 그는 음악과 미술의 상응 관계를 조명하기 위해 빨강, 노랑, 파랑 등을 중심으로 색채 구조에 몰두하였다. 그 결과 <빨강의 푸가_1921년>와 <a장조 풍경_1930년> 등 여러 작품에서 마치 악보 위에 음표들을 배열하듯이 색채들을 배열하는 시도를 보였고, 이러한 시도는 미술사에서 한 획을 긋는 이정표가 되었다.
◇ 파울 클레 센터에 소장된 <루체른 공원>
1933년 12월, 화가로서 성공을 거둔 파울 클레에게 뜻하지 않은 불행이 찾아왔다. 독일에서 나치는 유대인에게 호의적이었던 클레를 핍박했고, 그의 작품 100여 점을 강탈해갔다. 이 사건을 계기로 교수직에서 물러난 클레는 고향 베른으로 돌아왔다.
불행하게도 이때 클레의 손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는 난치병이 더욱 심해져 그림뿐만 아니라 바이올린도 더는 연주할 수 없을 만큼 심신이 피폐해졌다. 열정적으로 그림을 그렸던 클레가 1936년에는 불과 25점밖에 그림을 못 그릴 정도로 그의 육체와 정신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하지만 클레는 자신의 마지막 남은 예술적 영혼을 아주 치열하고 아주 잔인하게 짜내기 시작해 1937년에는 264점, 1938년에는 그보다 거의 두 배에 가까운 489점을, 생의 마지막 전해인 1939년에는 무려 1254점을 그렸다. 그리고 1940년, “나는 이 세상에서 이해될 수 없는 존재다. 내가 편안하게 머무는 곳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 사이에 있다. 보통의 경우보다는 조금 더 창조의 핵심에 다가가 있지만, 아직 충분하다고 할 만큼은 아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짧은 생애를 마감하였다.
하지만 파울 클레가 남긴 보석 같은 작품들은 예술로 승화되어 영원히 우리 가슴속에 남을 것이다.
◇ 생계를 위해 바이올린 연주자로 활동햇던 클레 (맨 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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