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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바위와 사막에 피어난 천혜의 요새

제주한라병원 2014. 8. 28. 10:41

붉은 바위와 사막에 피어난 천혜의 요새
요르단 페트라

 

 

좁고 기다란 협곡 사이에 똬리를 튼 고대 도시, 페트라

 

요르단의 보물로 불리는 페트라는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함께 황량한 사막에서 찬란한 문화를 꽃피운 대표적인 유적지다. 우리에게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인디아나 존스 - 마지막 성배’의 촬영 장소로 잘 알려져 있다. 로마제국 시절 이스라엘의 왕을 지냈던 헤롯이 바로 페트라 출신이고, 뉴욕 타임지에서 선정한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 중에서 1순위로 꼽히는 곳도 역시, 페트라다. 이런저런 이유로 유네스코에서는 1985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이곳을 지정해 아랍 유목민의 문화를 관리하고 보존하고 있다.


찬란한 고대 도시 페트라는 300m에 이르는 험난한 붉은 바위를 깎고 파내어 궁전∙보물창고∙무덤 등이 들어섰다. 그리스어로 ‘바위’라는 의미를 지닌 페트라는 오래전부터 바위가 많은 곳으로 유명했던 지역이다. 붉은 빛의 왕국이자 고대 도시인 페트라는 요르단의 수도 암만에서 서남쪽으로 150km 떨어진 곳에 있다. 세계 8대 불가사의 중 하나일 정도로 자연과 인간의 오묘한 조화가 스며 있는 신비로운 곳이다. 거친 듯 부드러운 듯, 단순한 듯 정교한 듯 바위 속에 새겨진 아름다움이 2000여 년이 흐른 오늘도 그 화려한 빛을 뿜어낸다. 

 

 

처음 발굴 당시 신전으로 알았던 알 카즈네는 나바테아 왕, 아테라스 3세의 무덤으로 밝혀졌다.

 

아침 맑은 햇살을 받으면 영롱한 장미 빛으로 물드는 페트라는 그 이름만큼이나 황홀함 그 자체이다. 깎아지른 절벽 틈새로 햇살 몇 줌이 파고들면 밤새 품었던 페트라는 아름답고 유구한 역사를 하나 둘씩 드러낸다. 세상에 이렇게 불가사의 한 도시가 또 있을까? 연신 감탄사가 나올 만큼 페트라가 지닌 매력은 이루 형언 할 수 없다. 왜 나바테안 사람들은 험준한 바위산에 엄청나게 큰 도시를 건설했을까? 이런 1차원적인 의문은 페트라에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높은 산꼭대기에 성이나 사원 등을 지어 외적으로부터 침입을 막는 고대 건축물은 많지만 수많은 바위산을 병풍처럼 등지고 좁은 협곡 사이에 도시를 건설한 것은 단연 페트라뿐일 것이다.
인류의 소중한 문화유산인 페트라는 기원전 7세기부터 2세기까지 이 지역에 살던 아랍계 유목민, 베두인의 조상 나바테안 사람들에 의해 해발 950m에 건축된 산악도시이다. 붉은 바위를 나무처럼 자유자재로 깎아 만든 페트라는 궁전과 수많은 무덤 그리고 원형경장이 모진풍파에도 불구하고 잘 보존돼 있다. 무엇보다 페트라는 6세기 때 지진으로 인해 도시 전체가 흙으로 묻혀 있다가 1812년 스위스의 작가 요한 루트비히 부르크하르트에 의해 발견됐다. 현재 우리가 여행할 수 있는 페트라는 나바테안 인들이 건설한 도시 전체 중에 1/4에 해당한다.

 

 

바위 위에서 내려다 본 페트라의 전경

과거에 이곳은 고대 도시로 이스라엘, 시리아,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사이에 위치한 왕국이었는데, 고고학자들은 이곳을 묘지로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페트라는 인구 25,000명의 도시였고, 신전을 비롯해 로마제국 속주들처럼 다양한 시설들이 협곡 속에 똬리를 틀고 꽁꽁 숨어 있었다. 다만 로마제국의 속주들과 도시 형태가 다르게 건설된 것이 특징이다. 흔히 이탈리아 폼페이 유적지처럼, 도시는 큰 대로를 중심으로 길 양쪽에 다양한 물건을 파는 상점이 들어 서 있고 그 뒤로 일반 주택이 자리하였다. 그러나 페트라는 도시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큰 대로가 없고, 도로의 끝과 끝을 잇는 대로도 없다. 반듯한 로마제국의 속주들과 다르게 도로가 거미줄처럼 얽혀있는데, 이것은 나바테안 인들이 가족이나 부족을 중시하는 폐쇄성을 기반으로 도로가 설계된 것이다. 하지만 이 민족이 어떤 특징을 가졌는지에 대한 문헌적 정보는 그리 많지 않다. 그저 아라비아 반도 출신의 유목민들로 처음엔 실크로드 상인들을 대상으로 노략질로 부를 쌓은 산적(山賊)이었다고 한다. 지정학적으로 깊은 협곡에 숨어 있던 나바테아 인들은 기원전 4세기 알렉산드르 대왕의 동방원정 때도 피해를 하나도 입지 않았고, 오히려 그가 죽은 뒤 산적의 도시에서 실크로드 중계무역도시로 발전하였다. 기원전 1세기 전후로 나바테안 인들은 페트라를 중심으로 지중해와 아라비안 반도까지 이르는 거대한 왕국으로 발돋움하게 된 것이다. 그 밑바탕에는 나바테안 인들이 주로 거래한 다양한 종류의 향신료와 방향성 식물의 독점적 거래가 있었다. 이들은 마조람, 장미기름, 헤나, 유향 거래, 소금, 인도 향신료 등을 독점 했는데, 그 중에서도 유향은 페트라를 부자 왕국으로 만드는데 일등공신이었다. 유향은 아라비아 반도에서 서식하는 나무에서 추출된 나무기름으로 종교의식, 미라제작 등에 반드시 사용되는 것이었다. 페트라에서 이스라엘이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까지 유향을 운반하여 이탈리아 로마를 비롯한 로마제국 속주에도 수출하였다. 이처럼 중계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나바테안 인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과시하기 위해 오늘날 우리가 보는 페트라의 다양한 유적을 짓기 시작했다. 그 당시 최고로 훌륭한 건축물을 짓기 위해 이집트와 그리스 건축가들을 총 동원해 사막 속에서 아름다운 도시를 만들고자 하였다. 현재 페트라의 유적은 이 도시가 전성기를 누렸던 1세기 전후로 만들어진 것이다.


비밀의 도시, 페트라로 들어가려면 좁고 가파른 절벽으로 둘러싸인 협곡 ‘시크’를 통과해야 한다. 1km 남짓한 시크 옆으로는 거대한 붉은 사암이 요새처럼 가로막는다. 하늘에서 보면 거대한 바위 틈새로 뱀이 꿈틀대는 모양이다. 이렇게 좁은 협곡 사이에 길을 낸 것은 적으로부터 안전하게 도시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외적들의 침입 시 협곡 위에서 돌을 굴리거나 화살을 쏘면, 적은 영락없이 덫에 갇히게 된다. 이처럼 나바테아 인들은 페트라의 자연적인 지형을 고려해 도시를 건설했고, 그 이유로 현재까지 페트라가 완벽하게 보존될 수 있었다.

 

 

병풍처럼 둘러싸인 거대한 바위산 뒤에 페트라가 존재한다.
 

우마차가 겨우 지날 만큼 좁은 협곡의 시크를 따라 페트라 내부로 한 걸음씩 다가서면 주변을 둘러싼 오묘한 색깔의 바위들과 만나게 된다. 시크 끝머리에 다다르면 첫 번째 유적인 알 카즈네가 붉은 빛을 가득품고 고고한 자태를 보여준다. 페트라에서 가장 완벽하게 보존된 알 카즈네는 너비 30m, 높이 43m의 부조 건물이다. 기둥이나 벽을 세우지 않고 오로지 바위를 정교하게 다듬고 파내서 만든 알 카즈네는 페트라의 상징이자 요르단의 문화 아이콘이다. 처음 알 카즈네가 발견되었을 때 많은 고고학자들은 이곳을 ‘신전’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유는 6개의 원형 기둥을 근간으로 2층 구조로 헬레니즘 양식의 신전을 연상케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 카즈네 외부 기둥 밑을 깊이 파고들자 이곳이 신전이 아닌 무덤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기원전 1세기경에 건설된 알 카네즈는 ‘보물창고’라는 뜻으로 나바테아 왕, 아테라스 3세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외에도 800여 개의 계단을 올라가면 나바테아 인들이 주요 성지인 알데히르, 거대한 바위산을 깎아서 만든 로마극장 등 이곳 사람들의 기발한 독창성과 그들의 건축 기술을 느낄 수 있는 곳이 많다. 이 중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사람의 손에 의해 하나씩 깎인 33층 계단, 70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로마극장이다. 이곳은 페트라에서 행해지는 각종 행사, 회의, 종교 의식 등이 열렸다. 페트라는 수백 년 동안 아랍문화와 로마 가톨릭 문화가 어우러져 사막에 독특한 문화의 꽃을 피워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을 선사한다.


영국의 저명한 시인이자 신부인 존 버곤은 페트라를 “영원한 시간의 절반만큼 오래된 장밋빛 같은 붉은 도시”라고 노래했다. 그의 말처럼 폐트라는 붉은 사막 위에 화려하게 꽃을 피운 인류의 소중한 자산이다. 지금은 나바테아 인들 대신 베두인들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선정되면서 협곡 안에서 더 이상 베두인들이 거주를 하지 않지만 그 주변 지역에서 나바테아 인들의 정신을 계승하며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