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데하르 양식의 아름다운 중세도시
스페인 톨레도
▲ 500년 전, 엘 그레코가 그린 ‘톨레도의 풍경’처럼 도시의 옛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톨레도.
톨레도의 거리에는 마치 시간의 존재를 무시하듯 중세의 고풍스러움이 곳곳에 묻어 있다. 1597년 그리스 출신의 화가 엘 그레코가 그린 ‘톨레도의 풍경’이 지금 이 도시에 환생한 듯 그대로 남아 있다. 고도古都 톨레도! 새털 같은 시간이 많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중세의 우울함이 산과 들 그리고 건물들에 화석처럼 살아 있다니! 건물 내부와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그리고 사람들의 옷차림 정도가 다를 뿐 그레코가 그린 ‘톨레도 풍경’처럼 회색 빛 도시의 칙칙함과 어두움이 5백 년을 뛰어넘어 오늘날까지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톨레도가 스페인의 수도였던 적이 두 번 있었다. 로마제국이 위태로울 때 게르만인의 서고트족이 지배했을 때와 스페인에서 이슬람 세력을 몰아낸 이사벨 여왕이 통일된 스페인의 수도로 톨레도를 선택했을 때이다. 그만큼 이 도시가 스페인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스페인의 수도로서 명성을 날리기 이전부터 톨레도는 16세기 서양미술사에서 큰 획을 그은 엘 그레코의 예술적 자취로 인해 세상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았다. 크레타 섬에서 태어나 36세 때 톨레도로 조용히 찾아와 40여 년을 종교화와 초상화를 그리면서 생애를 보낸 그레코. 그의 본명은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폴로스이지만 이탈리아 어로 ‘그리스인’이라는 뜻의 그레코로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다. 16세기 후반 스페인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한 그레코의 화풍은 선각자적 예술혼으로 훗날 추상화의 대부로 통할 만큼 시대를 앞서 갔으며, 20세기에 들어서야 많은 비평가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다소 인상주의적인 냄새를 풍기기도 하지만 20세기에 나타난 추상화풍을 무려 5백 년이나 앞서 자신의 화풍으로 만들었다는 극찬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얼굴이 다소 기형적이고 심하게 왜곡되어 있다. 그래서 그레코의 그림들은 그의 눈이 사시나 혹은 심한 난시가 아니었을까 하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킬 만큼 독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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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로처럼 얽힌 좁은 골목길이 아름다운 도시, 톨레도 |
▲ 톨레도에서 40여 년 동안 그림을 그리며 살았던, 엘 그레코의 집 내부. |
서양미술사를 다룬 책에서 우연히 발견한 그레코의 〈톨레도 풍경〉은 이국 만 리 떨어져 있는 목마른 여행자들에게 강한 빛을 발사하며 사람들의 발길을 이곳으로 유혹한다. 73세로 생을 마치기까지 그레코가 그토록 사랑했던 톨레도! 과연 어떤 매력을 지녔기에 끊임없는 유혹의 손길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일까?
기원전 2세기 로마인들이 처음 도시를 건설한 후 서고트족과 아랍인에게 오랫동안 지배를 받았던 톨레도. 로마가 평당 유적이 세계에서 가장 많듯이 톨레도 또한 로마에 뒤지지 않을 만큼 중세 유적으로 가득 차 있어 도시 전체가 마치 박물관을 연상시킨다. 타호 강이 삼면을 둘러싸고 흐르는 언덕 위에 살포시 주저앉은 톨레도는 그레코의 종교적 신비감으로 온통 휩싸인 채 중세 도시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레코는 톨레도 풍경에서 하늘을 검은 회색으로 표현했지만 500년이 지난 오늘날 하늘빛은 그의 명성만큼이나 눈부시게 푸르다.
◀ 산토 토메로 교회 안에 걸린 엘 그레코의 ‘톨레도의 풍경’ 그림
톨레도는 이슬람교도, 그리스도교도, 유대교도 등이 번갈아 지배했던 곳이라 다른 도시와는 다른 느낌을 준다. 특히 이슬람교도들이 지배하던 시대에 발달한 무데하르 양식은 톨레도를 특별한 아름다움을 지닌 도시로 만들었다. 이슬람의 풍 그리스도교 건축 양식인 무데하르 양식은 13~16세기에 걸쳐 스페인에서만 발달한 아주 독특한 양식이다. 800년 가까이 스페인을 지배한 이슬람 문화는 15세기 들어 국토회복운동에 의해 점차 쇠퇴하고 그 자리를 다시 그리스도교 문화에 넘겨주었다. 이때 로마네스크 건축물이나 고딕 건축물들은 이슬람풍의 화려한 아라베스크 무늬와 말굽 모양 아치, 평면에 붙이는 타일 장식 등 특이한 공간 구조를 연출해 유럽 다른 나라들에서는 볼 수 없는 스페인 고유의 그리스도교적 무데하르 양식을 만들어냈다. 훗날 이 양식은 스페인 최고 건축가 가우디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무데하르 양식 중 대표적인 건축물로 손꼽히는 산티아고 데 알라바트 교회와 산토 토메 종루 등이 바로 톨레도에 있다.
그리스도교와 이슬람이 혼합된 정서가 창조한 또 다른 문화로서, 중세 건축의 스페인의 특징이라 일컫는 ‘무데하르 양식’은 톨레도를 신비스럽고 환상적인 도시로 만들었다. 수천 년 동안 변함없이 흐르는 타호 강을 사이에 두고 언덕 위에서 시내를 바라다보면 그레코의 톨레도 풍경과 같은 도시 풍경이 그대로 들어온다. 언덕을 내려와 시내로 점차 다가가면 도시의 화려함과 웅장함에서 중세 수도의 당당한 면모를 느낄 수 있다. 중세 톨레도가 세계 문화ㆍ경제 중심지였다는 데 전혀 손색이 없을 만큼 도시 첫인상은 위풍당당하다. 하늘이 제대로 안 보일 정도로 건물과 건물 사이는 비좁고, 과거 인구 밀도가 높아서인지 건물들은 생각보다 고층으로 지어져 있다. 무데하르 양식 건물들이 들어선 시내를 돌아다니다 보면 발길이 먼저 닿는 곳이 바로 산토 토메로 교회다. 종교의 도시답게 이곳은 그레코의 많은 작품이 교회 내벽을 장식하고 있다. 그중에서 그의 대표작인 ‘오루가스 백작의 매장’이 사람 발길을 붙잡는다. 또한 그레코의 ‘베르도의 눈물’과 스페인의 대표적인 화가, 고야의 ‘그리스도의 체포’ 등이 산토 토메로 교회를 마치 미술관처럼 느껴지게 한다.
톨레도의 영원한 영혼의 안식처, 산토 토메로 교회의 전경 ▶
중세의 도시가 그렇듯이 톨레도 또한 규모 면에서 그리 큰 도시는 아니다. 다리품을 조금만 팔아도 도시를 다 구경할 만큼 작은 톨레도이지만 중요한 건물들은 다 갖추고 있다. 고딕 양식으로 지어졌고, 현재 스페인 그리스도교의 총본산이라고 하는 카테드랄, 전쟁의 아픈 기억을 갖고 있는 알카사바, 무데하르 양식이 자랑하는 아름다운 아치와 문양으로 장식된 교회들이 톨레도를 찾은 여행객들의 감수성을 자극하고 소중한 추억을 선사한다.
톨레도를 여행한 뒤에 가장 크게 남는 인상은 그레코가 그린 사람들의 표정이다. 색채가 그리 화려하지 않고 회색을 많이 사용해 다소 어둡고 우울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지만 사람들의 독특한 표정과 눈빛에는 분명 그레코의 열정이 숨어 있는 듯하다. 사람들의 선입견이라는 것이 참으로 놀랍다는 것을 톨레도를 다녀와서 느낀다. 분명 여행하는 동안 톨레도는 맑고 푸르고 깨끗했지만 그곳을 떠올릴 때는 자꾸 그레코의 회색 빛 하늘과 어두운 도시 풍경이 생각난다. 아마 그곳에 가기 전에 처음 보았던 〈톨레도 풍경〉이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쉽게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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