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둑과 상업의 신, 헤르메스 Ⅰ-
영리하고 교활한 강도이며 밤의 파수꾼
이번 호에서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올림포스 열두 신 중 하나이며, 영리하고 순발력 뛰어난 헤르메스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올림포스의 열두 신을 정리해보자. 신들의 아버지 제우스와 그의 아내 헤라, 바다의 신 포세이돈, 오누이 아폴론과 아르테미스, 지혜의 여신 아테나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 전쟁의 신 아레스와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 모신 테메테르와 가정과 화덕의 여신 헤스티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어린 헤르메스가 있다.)
사회생활 초년병 시절, 파리에 출장을 간 적이 있다. 광고대행사 PD로서 촬영 때문에 간 장기 출장이었는데, 주말에는 서구사회의 여러가지 여건상 도저히 작업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제작 스텝들과 잠시 여유를 갖고 현지 코디네이터의 안내로 함께 시내를 돌아보는데, 그 유명한 샹젤리제 거리에 유독 눈에 띄는 명품 가게가 있었다. 이름하여 에르메스. 말과 마부, 그리고 마차가 새겨진 로고를 사용하고 있었고, 표기는 HERMES로 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헤르메스(Hermes)도 철자는 비슷하게 쓰지 않던가? 싶었다. 그래서 자세히 알아보니 상통하는 바가 없는 별개의 이름이었다. 명품 에르메스라는 이름의 출발은 독일 크레펠트 출신으로 프랑스 파리에 망명해 말안장을 만들던 가죽 장인 티에리 에르메스의 이름에서 연원한다. 1837년 티에리 에르메스의 마구(馬具) 용품 가게에서 출발한 에르메스는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1등 상을 수상하며 솜씨를 인정받았고 세계 왕실과 귀족들에게 제품을 공급하기 시작했다. 결국 두 이름은 따로 따로 존재하는 별개의 이름이었다.
하지만 그리스 신화 속 헤르메스라는 영리한 주인공의 이름이 어찌어찌 이어져 유럽 어느 가죽 장인 가문의 성씨로 연결되진 않았을까 하는 나 혼자만의 추측은 아직도 지우지 못하고 있다. 여하튼 두 이름의 연관성은 접어두고 신화 속 헤르메스의 이야기로 들어가 보자.
제우스에 대항했다는 이유로 하늘을 떠받치게 된 거인 아틀라스와 플레이오네 사이에서 일곱 자매가 태어났다. 알키오네(Alcyone), 켈라이노(Celaeno), 엘렉트라(Electra), 마이아(Maia), 메로페(Merope), 아스테로페(Asterope), 타이게타(Taygeta)인데, 이들을 일컬어 플레이아데스라고 한다. 오늘날에는 별자리 이름으로 남아있기도 하다.
이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여신이 마이아인데, 가장 겸손하고 수줍음이 많은 여신이었다. 그녀는 신들의 세계를 피해 그리스 남부 아르카디아 지방의 킬레네 산에 있는 동굴 속에서 조용히 지내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발견한 제우스는 우리의 예상을 거스르지 않고 역시 곧 사랑에 빠져버린다. 호머는 <헤르메스에게 바치는 찬가>에서 “깊은 밤, 헤라의 흰 팔이 달콤한 졸음에 겨워 자리에 눕혀지면, 제우스는 아름다운 곱슬머리를 한 마이아의 잠자리로 아무도 모르게 찾아 든다” 고 노래했다. 제우스의 바람기야 하루 이틀 된 것이 아니니 여기까지는 그렇다 치자. 그 다음 구절이 가관이다. “때가 되었을 때 마이아는 아들을 낳았으니 그는 영리하고 교활한 강도이며, 목동과 꿈을 인도하는 자이고, 밤의 파수꾼이며 문가에 서 있는 도둑이니, 그는 곧 신들 사이에서 놀라운 일들을 행하게 되리라.”
그리스인들은 교활한 강도이자 도둑인 헤르메스를 천상의 많은 신들보다도 더 친근한 신으로 찬양한 것이다. 요즘 젊은이들 말을 빌리자면 ‘헐~~’ 하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그리스 초기의 명문 귀족들이 초기 미국 서부의 농장주들처럼 서로 소떼를 훔치는 것을 일종의 스포츠처럼 즐겼다는 사실을 알고 나면 약간은 이해
해줄 법도 하다. 그 후 시간이 흐른 뒤에는 물론 정식 땅문서도 만들어지고 계약을 통한 상거래도 이뤄졌지만, 그래도 영리함과 교활함을 무기로 많은 재산을 모은 자들은 능력 있는 자로 인정을 받았다. 이러한 면 때문에 근,현대의 은행, 보험회사나 무역회사들 중 신화 속 헤르메스의 모습을 자기네 로고에 차용하거나 이름을 가져다 쓰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아닐까.
여기서 잠시 헤르메스의 외모를 살펴보자. 고전시대 그리스 예술에서 헤르메스는 흔히 독특한 모자를 쓰고 알몸으로 방랑하는 아름다운 젊은이로 묘사되어 있다. 헬레니즘 시대로 넘어와서는 그의 모자와 샌들에 날개를 다는 것이 관행이 되었다. 아마 헤르메스가 신들의 전령 노릇을 하기 위해 날아서 다녔기 때문이리라. 또 그는 전령임을 상징하는 지팡이를 들고 다녔는데 여기에도 대개 날개가 달려 있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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