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3월
종교의 향기가 피어나는 도시, 크라쿠프
얼마 전 세계의 성인 요한 바오로 2세의 서거와 관련해 교황에 관한 몇 가지 일화가 세상에 소개된 적이 있다. 그 일화의 하나가 교황의 첫사랑에 관한 것이었다. 요한 바오로 2세에게는 27세로 신부가 되기 전까지 10여 년 동안 불꽃같은 사랑을 나눈 여인이 있었다. 그러나 끝내 그들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30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교황과 신도의 신분으로 재회했다는 이야기였다. 사람들은 교황의 이루지 못한 사랑에 서글픔을 느낀 동시에 성인으로 추앙받는 교황에게도 한때 죽도록 사랑했던 연인이 있었다는 사실에 인간적인 매력과 따뜻함을 느꼈다.
“나는 행복합니다. 그대들 또한 행복하시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이 말을 가슴 깊이 되새기며, 그의 청년시절의 삶과 고뇌, 조국, 좌절, 희망, 사랑이 스며있는 크라쿠프를 찾았다. 거리에 들어서자 교황이 이곳에서 얼마나 존경받았는지 아니 폴란드에서 얼마나 존경받았던 인물인가를 한 눈에 알 수 있을 만큼 그의 초상화가 크라쿠프 거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크라쿠프는 영화 <쉰들러 리스트>나 ‘아우슈비츠 수용소’라는 단어로 더 잘 알려진 도시이기도 하다.
독일에 의해 무참하게 학살된 유태인들의 처참한 비극이 녹아 있는 크라쿠프는 1038년부터 바르샤바로 수도가 이전되기 전까지 558년 동안 폴란드의 문화, 경제, 정치, 예술, 종교의 중심지였다. 14~15세기에 전성기를 누린 크라쿠프 왕국은 체코의 보헤미안 왕국과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와 함께 중세 유럽의 문화중심지 역할을 해왔다. 세계대전 때 바르샤바를 비롯한 폴란드 전역의 모든 것이 파괴되었지만, 다행히 크라쿠프만은 독일 군정부가 있어 폭격을 맞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100년 동안 구시가지에 그 어떤 건축물도 세우지 않았을 만큼 중세 건축을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어 1978년 유네스코에서는 이곳을 세계 12대 유적지로 선정했다. 프라하와 함께 동유럽의 보석이라고 불릴 만큼 아름다운 건축물을 보유한 크라쿠프는 요한 바오로 2세의 고향으로 종교적으로도 중요한 곳이다.
크라쿠프는 과거 폴란드의 영화로움이 골목길과 성곽, 건축물과 구시가지 광장 등 도시 곳곳에 스며있다. 유네스코에서 이탈리아의 로마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먼저 선정했을 만큼 크라쿠프의 명성은 유럽에서 정평이 나 있는 천년의 고도이다.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보다 문화, 역사, 경제, 정치 등에 더 오래된 전통을 지닌 폴란드인의 정신적 수도이자 민족문화의 메카이다.
13세기부터 몽골과 터키에 의해 동유럽 대부분의 도시가 파괴되고 점령되었을 때도 크라쿠프만은 그 어떤 피해도 입지 않았다. 1596년 지그문트 3세가 폴란드 왕국의 수도를 바르샤바로 옮긴 후에도 크라쿠프는 여전히 왕의 대관식과 장례식이 치러질 정도로 폴란드 역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18세기에 폴란드가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에 의해 식민국가로 전락했을 때 오스트리아 령에 있었던 크라쿠프만은 자유도시로 인정받아 폴란드의 역사와 문화를 찬란히 꽃피웠다.
아름답고 우수한 크라쿠프의 문화는 가로, 세로 220m의 구시가지 광장에서 비롯된다. 유럽의 모든 도시들이 광장을 중심으로 방사성으로 뻗어나가듯이 크라쿠프 또한 정사각형 모양의 중앙 광장과 남서쪽에 있는 바벨 성을 중심으로 도시가 건설되었다. 네모난 광장을 중심으로 길쭉한 타원형 모양의 구시가지가 형성되었고, 북쪽에는 옛 성곽과 성문이 그대로 남아 있다. 하루에도 수천 명이 찾는 크라쿠프 구시가지 광장은 로맨틱한 사랑만큼이나 낭만적인 분위기가 흐른다. 관광객을 위한 마차가 광장을 누비고, 노란색의 직물회관, 두 개의 높은 첨탑이 인상적인 성 마리아 성당, 구시가지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구시청사, 수십 개의 노천카페와 레스토랑이 밀집된 중앙 광장은 유럽에서 가장 크고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광장에서 서쪽으로 5분만 걸어가면 교황이 젊은 시절의 열정이 담긴 야기엘론스키 대학이 나타난다. 규모나 분위기가 우리의 대학교와는 사뭇 다르지만 이곳은 요한 바오로 2세와 할리나가 사랑을 속삭였던 상아탑이자 독일 점령 시 그들이 레지스탕스로 활동할 때 근거지가 되었던 명문대학이다.
크라쿠프의 역사의 터줏대감인 야기엘론스키 대학은 1363년 카지미에즈 왕에 의해 설립되었다. 이 대학은 체코의 카를 대학에 이어 동유럽에서는 두 번째로 오래되었을 만큼 찬란한 역사를 자랑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코페르니쿠스도 이 대학에서 공부했으며, 1996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도 이곳에서 젊은 시절을 책과 함께 보냈다. 그 역사가 7백 년이 넘는 대학 교정을 이곳저곳 다니다보면 책에 파묻혀 열심히 공부하는 코페르니쿠스를 만나기도 하고, 시원한 그늘 아래에서 대본을 들고 연극 연습에 빠져 있는 카롤과 할리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세월에 의해 그들은 모두 떠났지만 야기엘론스키 대학에 남아 있는 그들의 열정만은 변함이 없다.
학문의 열정만큼이나 크라쿠프는 종교적 열정도 많은 곳이다. 교황의 고향이기 때문에 당연히 도시에는 가톨릭 성당과 교회가 거리 곳곳에 가득하다. 중앙 광장에서 역대 폴란드 왕들이 거주했던 바벨 성으로 가다보면 고딕양식, 르네상스 양식의 크고 작은 교회들이 길을 따라 나란히 들어서 있다. 특히 그로츠카Grodzka 거리에는 성 요셉 교회, 성 앤드류 교회, 성 마르틴 교회, 성 페트로 파울로 교회 등 외형적으로 너무나 아름다운 교회들이 들어서 있다. 이곳의 교회들은 전쟁에도 전혀 파괴되지 않아 건축 박물관으로 여겨질 만큼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그로츠카 거리를 따라 남쪽으로 5분 정도 내려가면 석회암 언덕에 지어진 바벨 성이 눈에 들어온다. 비수와 강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언덕 위에 세워진 바벨 성은 11세기부터 건축되기 시작해 16세기에 완성되었는데 폴란드 왕국의 상징이자 크라쿠프의 자랑거리이다. 무엇보다 대성당에서 요한 바오로 2세가 주교로 10년간 몸담았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대성당은 폴란드 왕들의 대관식과 결혼식 그리고 장례식이 거행된 곳으로 지하에는 왕족, 민족 영웅, 예술가들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 성당의 내부는 감탄사가 절로 날만큼 화려하고 세련된 조각과 벽화들이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성당 내부의 기둥과 바닥을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산마르코 대성당처럼 검은 대리석으로 장식한 것이 특징이다. 성당 안은 언제나 조용하고 엄숙한 분위기다. 희희낙락거리던 관광객들이나 현장 학습을 나온 어린이들도 성당 안에만 들어서면 말을 아끼고 행동이 조심스럽다. 미사가 없는 시간에 의자에 앉아 성당 내부를 꼼꼼하게 살펴보는 동안 우리의 마음은 차분해지고, 어디선가 교황이 가까이 다가와 고뇌에 찬 우리에게 희망의 빛을 한 줌 뿌려주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한 평생 가난하고 굶주린 자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교황 바오로 2세. 그가 남긴 “나는 행복합니다. 그대들 또한 행복하시오.” 라는 말은 두고두고 우리의 심금을 울린다.
한 거장의 삶의 흔적을 좇아 도시 이곳저곳을 살피다 보면 다른 때보다 여행의 추억은 배가 된다. 중세 거리에 넘쳐나는 크라쿠프의 강한 생명력과 소박한 꿈을 꾸며 살아가는 시민들의 모습에서 교황이 진심으로 바라는 행복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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