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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형 인간 이야기 VI-스티브잡스의 설득커뮤니케이션1

제주한라병원 2012. 2. 1. 11:01

2010년/12월

창조형 인간(人間) 이야기 VI
- 스티브 잡스의 강렬한 설득 커뮤니케이션 1

 

신제품 출시를 알리기 위한 제품발표회장의 거대한 화면 위에는 짙고 푸르스름한 배경 외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텅빈 슬라이드가 세계 각국에서 온 기자들을 포함한 수많은 청중들의 시선을 잡고 있다. 그리고 발표자(프리젠터)는 격식 차리지 않은 편한 청바지와 소매를 끌어올린 간편한 티셔츠, 그리고 하얀 운동화 차림으로 군더더기 없는 발표를 시작한다. “오늘 우리는 함께 역사를 만들어갈 것입니다.(Together today, we’re going to make history.)”

 

이렇게 간결하게 시작하는 스티브 잡스 특유의 강렬한 프리젠테이션(PT)은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래서 그는 프리젠테이션의 귀재라고도 불린다. 이번 호에서는 그가 보여주는 예술적인 발표 커뮤니케이션을 살펴보자.

 

스티브 잡스는 노란 서류 봉투를 묶은 끈을 풀어 애플이 야심차게 개발한 제품, 맥북에어(애플의 신제품 노트북)를 꺼내는 과정을 청중들에게 공개한다. 놀랍다. 노란 서류봉투 속에서 말 그대로 공책(Notebook)을 꺼내드는 그의 모습을 보고 세상은 이렇게 얇고 가벼운 노트북이 탄생했다는 사실에 또 한번 놀랄 수밖에 없다.

 

경영분야의 작가인 세스 고딘은 프레젠테이션을 듣는 청중의 심리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 바 있다. “당신이 프레젠테이션을 하기 위해 모습을 드러내면 청중은 좌뇌와 우뇌를 모두 사용하길 바란다. 그들은 당신이 말하는 방법이나 의상, 제스처를 보고 판단하면서 우뇌를 사용한다. 또한 그들은 당신이 두 번째 슬라이드를 넘길 때쯤 이미 당신이 어떤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리면서 좌뇌를 사용한다.”

 

스티브 잡스는 이러한 분석을 이론적으로 배워서가 아니라 몸속에서 저절로 알고 활용하는 타고난 프리젠터인 듯하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도 알게 모르게 생활 속에서 다른 이들을 앞에 두고 뭔가를 발표하거나 설득해야할 일이 꽤나 많다. 스티브의 비결을 잠시 따라 해보면 작은 도움이라도 되지 않을까 싶다.

 

우선 그는 긍정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해 매우 인상적인 오프닝 후크(opening hook)를 준비한다. 맥북 에어라는 노트북을 세상에 소개하던 날 초반에 그가 던진 말 중 눈에 띄는 게 있다. “오늘 공중(air)에 뭔가가 있습니다.” 번역하니 좀 어색한데 영어로는 “There's something in the air.” 그날 발표할 제품명이 Macbook Air였으니 청중들이 시적인 감흥에 젖어드는 단초를 잡은 셈이다.

 

스티브 잡스는 신제품 ‘아이폰’을 설명하는 프레젠테이션에서는 힘찬 음악을 배경으로 무대 위로 올라갔다. 비즈니스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 음악을 크게 틀 것이라 예상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발표시간이 제한돼 있다보니 일분일초라도 준비해온 이야기를 설명하는데 급급하기 쉽다. 그러나 그는 초장에 밝은 음악(그때 음악은 미국사람들이 대부분 잘 알고 흥겨운 'I Feel Good'이라는 곡이었다)을 통해 긍정적인 분위기를 조성했고 관객은 환호하며 그를 맞이했다.

 

다음으로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 모든 것을 시시콜콜하게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 이런 자세는 피하는 것이 좋은 이유는 억지로 청중들에게 각종 논리나 상세설명을 집어넣으려 하다가는 더 중요한 것을 잃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대신 시각적인 이미지와 함께 잘 조합된 단어들이 청중의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스티브 잡스는 이런 부분에서도 뛰어나다.

 

빈 화면을 덩그러니 보여줄 때 청중들은 발표자에게 최대한 집중하게 되고, 발표자는 꼭 필요하고 중요한 메시지를 미리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다만 자기가 보여주어야 할 때 매우 큰 크기로 간단히 보여준다. 아이패드 신제품 발표회 때 제품의 가격을 소개한 장면은 매우 인상적이다. ‘$999’ 라는 문자만 그 큰 화면에 보이다가, 가격을 발표하는 시점에 위에서 떨어진 ‘$499’라는 문자로 앞의 문자가 산산이 부숴지는 장면이다.

 

스티브 잡스의 프레젠테이션은 이렇게 간결하다. 그가 보여주는 화면들은 ‘젠(Zen, 禪) 스타일’이 어떤 것인지 귀감을 제시하는 것 같다. 절제된 선의 아름다움, 암시적인 그림과 화살표, 달랑 단어 한 개만 있는 슬라이드를 보여준다든지, 상징적인 그림 하나를 보여줄 뿐이다. 단어와 그림은 그가 말하는 내용이라기보다는 그가 말하고 싶은 중요한 메시지를 알려줄 뿐이다. 따라서 청중은 화면에 기대기보다는 화면과 발표자 사이에서 즐거운 줄다리기를 하는 상호작용을 일으키게 된다.<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