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9월
술과 인간(人間)
- Ⅴ. 우리 술 이야기
‘술’하면 우리 머리에 언뜻 떠오르는 몇가지 키워드 중에 ‘폭탄주’라는 것이 있다. 언제부턴가 우리 음주 문화에서는 섞어 먹는 문화가 자리 잡아왔다.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대개는 빨리 취해 빨리 친해지기 위한 것이 주된 사연이 아닐까.
예전에는 양폭, 소폭 해가며 양주와 맥주를 섞어서 먹으면 ‘양폭’, 소주와 맥주를 섞으면 ‘소폭’이라고 불렀고 이들이 폭탄주의 주류를 이루었다. 그런데 최근 막걸리와 사이다, 그리고 소주를 섞은‘혼돈주’가 시류를 타고 유행한다고 한다. 아마도 알코올 도수가 6% 정도로 몸에 큰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사람에게 유익한 여러 가지 영양소를 갖추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우리 전통술, 막걸리가 새롭게 주목받으면서 생겨난 세태가 아닌가 싶다. 이렇듯 술 문화는 세대마다 시대마다 독특하게 발전해왔다. 이달에는 술 이야기의 마지막 편으로 우리나라의 술을 살펴보자.
우리나라의 원시시대에도 술은 만들기 쉬운 과실주에서 기인했을 것이고 이후 유목시대에는 유주(柚酒)가, 그리고 농경시대에 접어들면서 곡물을 재료로 한 곡주(穀酒)가 시작되어 오늘에 이르렀을 것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11년에 지주(旨酒)란 말이 나온다. 旨(맛좋은 음식- 지)의 뜻으로 볼 때 지주는 ‘맛좋은 술’이란 뜻이리라. 고구려의 술 제조 수준을 엿볼 수 있다. 또 당나라 때의 시인 옥계생(玉溪生)은 '한 잔 신라주(新羅酒)의 기운이 새벽바람에 쉽게 사라질까 두렵구나' 라고 읊조렸다. 당나라 문인들 사이에 신라주(新羅酒)의 인기가 좋았음을 짐작케 한다.
한국의 전통술은 탁주, 약주, 소주로 구분되는데 이 가운데 제조방법으로 볼 때 탁주가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고, 탁주에서 재(滓)를 걸러 약주가 되었으며, 이를 증류해 소주가 만들어졌다.
삼국시대 이래 양조기술의 발달로 약주가 등장했지만, 탁주와의 구별이 뚜렷하진 않았다. 같은 원료를 사용해 탁하게 빚을 수도 있고 맑게 빚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탁주는 이화주(梨花酒)였다. 이 이름은 탁주용 누룩을 배꽃이 필 무렵 만든 데서 유래했는데 후세에 와서는 누룩을 아무 때나 만들게 되었으므로 이화주란 이름은 사라지고 말았다.
고려시대에는 송이나 원나라의 양조법이 도입돼 쌀과 보리를 이용해 술을 만들었으며 종류도 다양해졌다. 또 고려시대의 사원은 오늘날의 여관업을 겸하고 있었기에 사원에서 술을 빚어 팔기도 하였다. 특히 후기에 들어서는 몽고의 침공으로 증류주(소주) 문화가 유입되어 쌀이나 보리 뿐 만 아니라 수수, 조 등을 이용한 술도 개발된다.
이후 조선시대를 거치며 재료가 멥쌀 위주에서 찹쌀로 고급화되는 등 우리 술은 고급화 추세를 보인다. 역사상 손꼽힐 정도로 질 좋고 다양한 종류의 술이 이때 개발, 정착된다. 특히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지방마다 비전(秘傳)된 술들이 제각기 독특한 멋과 맛을 내기 시작한다.
당시의 명주로 서울의 약산춘, 여산의 호산춘, 충청의 노산춘, 평안의 벽향주, 김천의 청명주 등이 있다. 또 소주에 각종약재를 첨가한 술들이 새로 개발되었는데 전라도의 이강주, 죽력고 등이 유명했다. 그리고 약주가 변질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양조주(곡주)와 증류주(소주)를 혼합한 혼성주인 과하주가 여름에도 마실 수 있는 술로 개발되었다. 이처럼 활짝 핀 우리 술 문화는 일제 침략을 맞이하기 전까지 절정기를 이룬다.
그러나 19세기 말 양주문화가 도입되고, 그후 국권이 일본으로 넘어가면서 일제가 과중한 주세를 부과하는 바람에 전통적인 향토주와 토속주는 자취를 감추고 신식 술이 획일적으로 제조되는 등 우리의 전통 술은 극도로 위축되었다. 그 후로도 식량난의 명분을 들어 사적인 양조가 금지되면서 이러한 우리 전통술의 위축은 지속다가 근래에 들어서야 그 가치를 되살리고자 하는 노력이 커지고 있다. 마치 프랑스의 와인이나 일본의 사케와 같이 우리도 각 지방의 독특한 풍토와 문화가 담긴 막걸리와 전통술을 재현하려는 시도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술은 백약지장(百藥之長)이라 불리기도 하고, 백독지원(百毒之源)이라 불리기도 한다. 술에는 양면성이 있어 잘 쓰면 약(藥), 잘 못 쓰면 독(毒)이 될 수 있는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술을 마시면 열량과 수분도 섭취하고 스트레스를 해소하게 하여 사람의 건강에 도움을 주며, 인간관계의 윤활유 노릇도 톡톡히 한다. 그렇지만 알코올 도수가 높은 술을 과음・폭음하면 지방간이 되고 이것이 심해지면 간염과 간경화, 심지어는 암으로까지 악화될 수 있다. 이처럼 인간에게 좋기도, 나쁘기도 한 술이 우리 모두에게 좋은 약이 되게 하려면 아는 것이 먼저라는 생각으로 ‘술 이야기’시리즈를 연재했다. 독자 여러분께 작은 보탬이라도 되었기를 바라며 우리 전통술과 함께 풍요로운 한가위 맞으시기를...
'연재종료코너 > 안대찬세상만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대국(大國)의 조건 (0) | 2012.01.31 |
---|---|
노블레스 오블리제 (0) | 2012.01.31 |
동양의 술 이야기 (0) | 2012.01.31 |
술의 효과 (0) | 2011.12.02 |
술과 인간(人間)- II. 술의 활용 (0) | 2011.1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