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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종료코너/안대찬세상만사

노블레스 오블리제

제주한라병원 2012. 1. 31. 11:03

2009년 / 10월

노블레스 오블리제

 

 

 

고위 관료에 대한 임명과 인사청문회 과정에서는 부적절하거나 부도덕한 것으로 지적받을만한 그들의 과거 행적이 논란이 되곤 한다. 이때 신문을 장식하는 여러 이야기들을 보면 그다지 새롭지도 않다. 부동산 투기, 위장전입, 병역문제 등이 주류를 이룬다. 보통의 국민들에게는 항상 지켜야 할 것으로 교육되고 강제되는 너무나 기본적인 내용들인데...... 사회지도층이라고 하는 분들의 인사검증에 이런 흠결이 단골메뉴로 등장하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프랑스어로 ‘고귀한 신분에 따르는 도덕적 의무’라는 의미의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의 뿌리는 유럽의 상류층에서 연원한다. 로마시절부터 이어져 내려온 유럽의 이 전통은 그들의 사회를 유지하는 중요한 지표(指標)로 작용해왔다.

 

초기 로마의 왕과 귀족들은 평민보다 앞서 솔선수범과 절제된 행동으로 국가의 초석을 다졌다고 한다. 포에니 전쟁 때에 전쟁세를 신설하여 재산이 많은 원로원 의원들이 더 많은 세금을 부담했다. 그들은 제일 먼저 기부를 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수레에 돈을 싣고 국고로 달려갔다. 이것을 본 평민들도 앞다투어 세금을 내게 됐다. 또 끊임없는 전쟁으로 국고가 바닥이 나면 전시국채를 발행하여 유산계급과 원로원 의원, 그리고 정부요직에 있는 사람들만 구입토록 했다. 평민들에겐 전비 부담을 요구하지 않은 것이다.

 

아울러 그들은 평민들보다 먼저 전쟁터에 나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당시 귀족들의 전시사망률은 평민들에 비해 훨씬 높았다. 로마의 귀족들은 돈 뿐 아니라 피를 흘리는데도 앞장섰던 것이다. 따라서 평민들도 전쟁터에 나아가 나라를 지키는데 주저하지 않고 용감히 싸웠으며 이것이 로마군이 용맹함으로 유명한 이유였다. 이런 로마에 돈으로 산 용병으로 대항한 카르타고는 아무리 한니발과 같은 명장이 있었다고 해도 패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제는 로마가 황제정으로 바뀐 뒤에도 계속되었다. 팍스 로마나가 실현되고 직업군인제로 바뀌어 전쟁에 참가하는 일은 적어졌지만 여전히 공동체를 지키는 군복무는 명예로운 경력으로 간주되며 많은 귀족들이 공공사업에 자신의 재산을 기부하는 것을 명예롭고 당연한 의무로 여겼다.

 

 

 

영국의 사례를 보자. 1,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귀족들이 다니던 명문학교인 이튼칼리지 졸업생 중에는 2천명 이상의 전사자가 나왔다. 그리고 1982년 포클랜드 전쟁시에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차남인 앤드류 왕자가 가장 위험하다고 하는 헬리콥터 조종사로 전쟁에 참전함으로써 큰 화제가 되었다. 또 오늘날 미국 몇몇 사립대학은 사회적 저명 인사들이 내놓은 거액의 기부금으로 넘쳐나고 있다.

 

노블레스 오블리제라는 말이 선진국에서 나왔듯, 그들의 상류층은 재산과 권력 그리고 위신(威信)만 높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수준 또한 매우 높다. 그것이 그들 상류층이 '존경받는 상류층' 이 되는 이유인 것이다.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다. 상류층도 자유를 마음껏 향유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편법의 묘를 살린 부동산 투기를 하거나, 주민등록법을 어겨가며 위장전입을 하는 것 정도는 일상다반사라고 생각하거나 매우 하찮은 흠이라고 여기는 것이 그러한 자유의 영역은 아닐 것이다. 상류층이라면 최소한 일반 대중과 비슷하거나 또는 더 강도높은 도덕적 의무감을 가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

 

로마와 영국의 상류층이 고도의 도덕성과 사회적 책임감을 지켜감으로써 사회통합과 리더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해온 것을 우리나라의 상류층이 곱씹어볼 것을 촉구한다. ‘오블리제 없는 노블레스’가 우리사회에서 사라지는 날을 위해 상류층이 솔선해야 할 때다.

 

덧붙여 좀 다른 이야기지만 최근 기부활동을 포함해 상류층 일부에서 부의 사회환원 활동에 관심을 늘려가는 등 사회적 책임에 대한 의식을 높여가고 있는 것은 다행스런 일이다. 이러한 조짐이 소박한 자선 행위를 넘어서 기부문화의 정착으로 접어드는 과정이 되길 바란다. 자신의 위치에 따른 책임을 자각하고 사회적 약자를 돕는 것은 상류층이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가져야 할 아름다운 윤리다. 자신에게 부여된 의무와 윤리를 다할 때 그들은 자연히 빛나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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