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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들(2)

제주한라병원 2011. 12. 2. 15:11

2011년 / 11월

목소리들(2)
기억은 없지만 '존재했었다는 것' 어렴풋이 드러내

 

 가을이 깊어가는 동안 서점이 문을 닫기로 한 날이 다가왔다. 그러는 동안 L은 시간이 날 때마다 서점에 들러 아르바이트 직원을 도와 가게 정리를 도왔다. 서점의 책장은 하루가 다르게 텅 비어갔다. 반품할 책들을 목록에 맞게 모아 한꺼번에 싸두었다. 그러나 패션잡지나 학습지, 베스트셀러 소설 그리고 어린이 책은 제일 마지막에 정리하기로 했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책들인 만큼, 제일 마지막에 정리하기로 했다. 하지만 출입문에 폐업 안내문을 붙인 뒤로 그나마도 많지 않았던 손님들의 발걸음은 뚝 끊어졌다. 사람들은 대체로 완전한 형태를 갖추지 못한 곳에서는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찾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가끔 폐업 안내문을 보거나 혹 폐업 소식을 듣고 찾아오는 손님들도 있었다. 대부분 인근 상점 사장들이었다. 폐업하는 이유를 묻기 위해서였다. 어떻게 알았는지 근처에서 헌책방을 운영하는 이들이 찾아오기도 했다. 꼭 책이 아니더라도 책장과 같은 비품들을 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건 평소에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들르곤 했던 몇몇 손님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손님들은 대부분 근처 C대학 교수나 강사, 학생들이 많았다. 그들은 서점에 찾아와 헐값에 책들을 구입해가기를 원했다. 그런 사람들이 찾아올 때마다 사장은 입을 꾹 다문 채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이런 이야기를 직원에게 전해들은 L은 기분이 씁쓸해졌다. 누군가가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지 못해 쓰러졌을 때,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도와주는 것도 지인이지만 쓰러진 이를 떠미는 것도 지인들이었다. 그들은 평소의 친분으로 서점의 사정을 대강 아는 이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이해하는 것은 서점의 재정 상태였을 뿐이지, 사장의 마음은 아니었다.


  폐업 전날인 토요일 오후에도 L은 서점을 찾아갔다. 사장과 직원은 마지막까지 비우지 않던 책장의 책들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L이 들어가자 사장은 간단한 인사말만 던지고 이내 손에 들고 있던 책들의 목록을 쳐다봤다. 그리고 책 목록을 중얼거리듯 읽었다. 마치 너무 바빠 아무 감정도 없는 사람을 연기하는 배우처럼 어색했고, 그것은 가게를 가득 채운 분위기도 그랬다. L도 딱히 다른 말없이 장갑을 끼고 책들을 상자 안에 넣었다. 책장에서 책을 빼 상자에 넣는 행위가 반복될수록 지금 자신이 책장에서 책을 빼는 것인지, 아니면 박스에서 책을 꺼내 책장에 올리는 것인지 혼동하기도 했다. 그런 느낌이 들자, 문득 사장이 개업을 준비했을 때 어떤 모습이었을지 궁금해졌다. L은 개업하는 때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사장은 희망에 가득 차 책들을 책장 안에 차곡차곡 정리했을 것이다.

  그때 출입문이 열렸다. 직원이 어서 오세요, 라고 인사를 건네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도 이 서점 직원 다 됐구나. 돌아보니 L을 이 서점에 처음 데려온 선배가 서 있었다. 서점이 문을 닫는다는데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지.


  “하하 재미있는 생각인데?”


  선배는 부추전을 입에 문 채로 서점 직원의 말에 맞장구쳤다. 그러면서도 물론 사장님이 동의해야 하는 거지만, 이라며 사장의 눈치를 봤다. 사장은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눈치를 보는 걸 알았는지, 선배의 잔에 막걸리를 잔뜩 따라주었다.


  가게 정리를 대강 끝내고 사장과 직원, 선배, 그리고 L은 가게 근처 주점을 찾았다. 전골이 끓고, 술병이 비워지고, 마시고, 따르고, 전골에 육수를 채워 몇 번이고 다시 끓이는 동안 그 자리의 사람들은 점점 말수가 적어졌다. 모든 사라지려는 것들 앞에서는 침묵조차 소음이 되는 경우도 있는 법이다. 아니, 침묵의 시간이 길어지면서 사람들은 다들 더욱 시끄럽게 귓가에 맴도는 목소리를 듣고 있었을 것이다. 그 목소리는 서점을 알고 지낸 시간을 채운 모든 사람들의 목소리였고, 동시에 서점을 둘러볼 때마다 책 안에서 말하던 작가, 혹은 화자들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는 침묵 안에서 더욱 커지고 또한 선명해졌다.


  그 침묵이 이어지던 중 아르바이트 직원이 혼잣말을 하듯 생각을 말했던 것이다. 서점 스탬프가 찍힌 책을 보게 되면 엄청 반가울 거 같아요. 응? 그게 무슨 말이에요? L이 묻자 직원이 속마음을 들킨 아이처럼 수줍어하며 대답했다.

  “아니, 그런 거 있잖아요. 도서관에서 책들을 읽다보면, 그 책을 빌려간 누군가가 적어 놓은 메모들을 보잖아요. 특히 그 메모가 사적인 내용인 경우에는 엄청 궁금해지거든요. 뭐 숫자나 단편적인 단어들. 만약 누군가가 도서관에 갔는데, 청구기호가 붙어있는 대신 서점 스탬프가 찍혀 있는 걸 본다면 재미있지 않겠어요?”


  직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선배가 말을 이었다.


  “그 책들이 다른 책들, 그러니까 서점 스탬프가 찍힌 다른 책을 찾는 힌트가 되어도 재미있겠는데? 옳지. 여기 학교 도서관이면 더 좋겠네.”


  “예 맞아요. 어쨌든 이 지역에서 꽤 유명한 서점이었잖아요. 비록 가게는 없어져도 서점에 대한 기억만은 사라지지 않으면 좋겠어요. 학교 도서관에 갔다가 서점 상호 스탬프가 찍힌 책을 만나면 엄청 반가울 거 같아요. 도서관을 찾는 다른 사람들도 우연히 그 책을 보며 서점을 떠올리거나 궁금해 할 수도 있고요.”


  아마 그들이 그 이야기를 이어나갔던 것은 술기운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라져가는 것 때문이었을 것이다. 세상은 새로운 것들로 넘쳐나지만, 그 새로운 것들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동안 그 밝은 빛 뒤에서 기존의 것들은 조용히 소멸한다. 그리고 그런 현상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러다 어느 순간 밝은 빛에서 눈을 돌려 보면, 우리가 기억하던 것들은 흔적도 남아있지 않다. 다만 마음 어딘가에 텅 비어버린 채로 언젠가는 분명 존재했었다는 것을 어렴풋이 드러낼 뿐이다.


  그리고 결국 그들은 그 일을 실행하기로 결정했다. 각자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의 목록을 작성했고, 급기야 우리는 서점으로 되돌아가 우리가 적은 책들이 서점에 남아 있는지 확인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적은 책은 모두 스물 네 권이었고, 서점에서 찾을 수 있는 책은 여덟 권에 불과했다.

  그들은 책들에 나름의 순서를 부여했다. 그리고 그 책의 한 부분에 다음 책을 찾을 수 있도록 표시를 남겨두었다. 이를 테면, <811.4 – 책장 왼쪽에서부터 세 번째 칸 – 아래에서 세 번째 줄>, 이런 식으로 말이다. 책의 뒷표지 앞 간지에 서점 스탬프를 찍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이 책들을 근처 C대학 도서관에 숨기는 것은 아르바이트 직원이 맡기로 했다.  

  
  과연 사람들이 이 책들을 보고 관심을 가질까? 그것은 아무도 확신하지 못했다. 다만 한 단 사람이라도 우연히 이 책들을 보고 관심을 가져, 도서관에 숨겨놓은 여덟 권의 책들을 모두 읽고 서점의 존재를 상상했으면 좋겠다고 L은 생각했다. 단 여덟 권의 책이지만, 그것은 서점을 그리워하며 이 일을 꾸민 몇몇 사람들의 목소리이고, 서점을 기억하고 있던 모든 사람들의 목소리이며, 또한 서점에 있던 많은 책들의 목소리이기도 하니까.    


  그러니까 당신도 언젠가 도서관에서 청구기호가 붙어있지 않은 책들을 발견하면, 그 책을 잘 살펴보기 바란다. 필자나 화자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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