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 10월
목소리들(1)
L은 서점 출입문을 열고 들어갔다. L이 들어가자 얼마 전부터 일하기 시작한 파트타임 직원이 아는 체를 했다. 그는 프린트된 서류를 보고 반품시킬 책의 목록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L은 얼마 전 그녀를 처음 봤던 때를 떠올렸다. 서점 주인은 새로 일하게 된 직원에게 단골인 L을 소개해주며 말했다. 나보다 이 서점에 더 자주 오는 손님이야. 제대로 일하지 않으면 사장인 내가 아닌 이 손님에게 혼날 거야. 그러더니 다시 L을 보며 말했다. 대형 서점이 아니라 이런 작은 서점에서 일 해보는 게 꿈이었대. 요즘 애들 같지 않지? 직원은 L에게 다시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했다. 그게 불과 한 달 전이었다. 그때만 해도 서점 문을 영영 닫기 위해 책을 반품하는 게 주 업무가 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을 거다.
사장이 서점 영업을 그만두기로 한 것은 일주일 전이다. C 대학교에서 약 200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청맥서점은 이 동네 유일한 서점이었다. 학교 안에도 서점이 있기는 했으나, 그곳에서는 수업시간 교재들을 주로 팔았다. 청맥서점은 비록 크지는 않았지만 서울 시내에서도 꽤 알아주는 서점이었다. 그것은 희소가치 때문이다. 다른 서점들이 대학 교재나 토익, 컴퓨터, 자기소개서 등 어학 ‧ 실용서 위주의 책을 가져다놓는 반면, 이 청맥서점은 인문학, 사회과학 서적들을 많이 보유한 서점으로 유명했다. 특히 서점 한 측면에는 헌책들이 꽂혀 있는데, 이 헌책들을 뒤지다 보면 이미 절판되어 구하기 힘든 유명 인문학 서적들을 발견하기도 했다. 서울 시내에서 꽤 알아주는 서점이라고 했지만, 결국 인문학 서적을 원하는 손님들에게만 그럴 뿐이었다. 동네 사람들이나 인문학에 관심이 없는 손님들이 보기에 청맥서점은 서울 한 동네에 위치한 작은 동네서점에 불과할 뿐이었다.
게다가 그것이 사실이기도 했다. 최근 몇 년 동안 청맥서점이 간신히 영업할 수 있을 정도로 해준 것은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교재나 유명 연예인이 쓴 에세이였다. 대학의 분위기도 변했는지, 가끔 찾아오는 대학생들이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 어학교재를 사러 오는 학생들뿐이었다. 그나마 찾아온 학생들도 대형서점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은 수의 교재들을 보고는 슬그머니 발길을 돌리기 일쑤였다.
한때 뉴스와 신문에서 인문학 열풍이라며 시류를 소개할 정도로 인문학이 유행을 탄 적이 있었다. 불과 몇 년 전의 일이었다. 그때 사장을 비롯한 몇몇 단골손님들은 서점이 활기를 되찾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허울뿐인 유행이었다. 대중들이 찾는 인문학이란 진지한 인문학 자체가 아니라 인문학이라는 이름을 빌려 유행에 편승하려는 기획도서였을 뿐이다. 대학 또한 마찬가지였다. 학문 간의 벽을 깨고 활성화하겠다며 인문학이나 예술을 다른 전공과 융합시킨 전공이나 학과를 만들어냈으나, 정작 그 기본이 되는 학과에 대한 지원은 축소했다. 마치 땅위로 드러난 줄기와 열매를 보기 좋게 키우는 데에 열중하기 위해 뿌리에 주어야 할 영양분을 줄이는 것과 다름없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인문학을 전공하는 학생들도 서점을 잘 찾지 않게 되었다. 학문에 대한 공부보다는 취업을 위한 공부에 더 치중하게 된 것이다.
예전에는 인문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이 서점을 자기 방이나 혹은 휴게실처럼 드나들었다. 비록 돈이 없어 책을 사지는 못하더라도 서점에 찾아와 그냥 책을 읽다 돌아가는 학생들이 많았다. 가끔은 카운터에 죽치고 앉아 사장이나 직원과 함께 문학이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다 돌아가기도 했다. 이런 단골손님들은 서점을 자기 집안처럼 알고 있었다. 가령 새로운 직원이 책을 찾느라 애를 먹으면, 대신 책을 찾아주기도 했고, 직원이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혼내기도 했다. L도 이런 손님 중 하나였다.
C 대학에 입학하자 선배가 제일 처음 데려간 곳은 식당도 술집도 아닌 바로 이 서점이었다. 선배는 출입문을 열자마자 친구에게 인사하듯 직원과 아는 체를 하더니 L에게 말했다. 네가 원하는 책 두 권만 골라. 그러더니 선배는 익숙한 듯 카운터 옆 의자에 앉았고, 직원은 안에서 커피를 가져왔다. L은 서점 안을 천천히 둘러봤다. 서점이란 늘 사야할 어떤 책이 있을 때에 그 책을 사러 가는 곳이었지, 둘러보고 제일 마음에 드는 상품을 구입하는 백화점 같은 곳이 아니었다. 하지만 선배가 책을 고르라고 말한 순간, 그리고 서점 안의 책들을 살펴보는 동안 L은 지금까지는 해보지 못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책들이 말을 거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말을 걸었다기보다는 책들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혔다. 에세이들이 꽂힌 책장을 지날 때에는 작가들이 자신의 인생이나 어떤 순간에 대해 나긋한 목소리로 중얼거렸고, 소설 책장을 지날 때에는 더 적극적이거나 혹은 무관심한 척 그러나 흥미로운 이야기로 L을 불러 세웠다. 서점 안에는 무수히 많은 글자들이 있었고, 말이 있었고, 노래가 있었다.
이날의 경험은 L을 서점으로 끌어들이기 충분했다. 공강 시간이나 수업이 끝난 뒤에는 늘 서점에 와서 책을 읽었고, 후배가 들어오면 데리고 가 책을 사주었다. 첫 연애가 실패했을 때에도 L은 서점으로 숨어들었다. 책들이 가득 쌓인 구석에 앉으면 시인을 비롯한 많은 작가들이 그의 마음을 달래주었다. 어떤 책들은 L의 먹먹한 마음을 희망에 찬 언어로 가득 채워 주었고, 어떤 책들은 간신히 붙잡고 있던 감정을 순식간에 무너뜨려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리게 만들기도 했다. 이처럼 선배의 뒤를 따라 서점 출입문을 지난 이후, L의 대학생활의 중심에는 언제나 청맥서점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 공간이 그리고 시간이 없어지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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