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 12월
베네딕틴 이야기
‘베네딕틴’이라는 술이 있다. 1501년 프랑스 북부 페캉 지역의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만들어진 술로, 약 27여 종류의 약초와 향초를 주원료로 하여 이것을 중성 주정에 침지한 후 증류하여 통에 숙성을 하여 만든 리큐르이다.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리큐르의 하나이다.
베네딕틴 병의 상표에는 D.O.M이라는 표시가 되어 있다. 이것은 라틴어로 Deo Optimo Maximo(최선을 다해 최대의 신께 바친다)의 약어인데, 이 의미처럼 처음에는 기도용 술로 사용되다, 180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일반인도 맛볼 수 있게 되었다.
베네딕틴을 마시면 허브와 벌꿀향이 오묘하게 뒤섞여 달콤하면서도 시원한 느낌을 준다. 또한 그 맛과 향이 신비롭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그 자체로도 신비롭고 매력적인 술이지만, 개인적으로 다른 술과 결합했을 때에 그 매력이 한층 더 빛난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가령 내 경우에는 베네딕틴 한 잔을 시켜놓고 카프리나 코로나처럼 그 향이 진하지 않은 술을 적당히 섞어 마시곤 한다. 그러면 시원한 맥주가 목을 넘어간 뒤 입 안에 달콤한 벌꿀향이 떠나간 누군가의 잔상처럼 남는다. 또한 요즘처럼 추운 날 가게에 뛰어 들어가 베네딕틴과 브랜디를 적당히 섞어 만든 칵테일 B&B를 주문한다. 언 몸을 녹이며 붉으면서도 황금빛이 감도는 그 술을 입에 대는 순간, 추위는 저 만치 물러나고 마치 산장의 장작불 앞에 앉은 듯한 따스함이 서서히 온 몸을 감싼다.
“27여 종류의 약초와 향초를 주원료로 사용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제조법은 극비랍니다. 코카콜라를 생각하면 돼요. 1%의 원료만은 극비라고 하잖아요.”
내게 베네딕틴이라는 술을 알려준 것은 오래 전 어떤 연말 모임에 나갔다가 만난 여인이었다. 당시 대학원에서 희곡수업을 하시던 교수님이 올린 연극 뒤풀이 자리에서였다. 그녀는 교수님이 출강하시는 다른 대학 연극영화학과 학생이었으나, 개인 사정으로 휴학 중이었다. 교수님의 또다른 제자인 셈이었다. 이런 공통점은 물론이고,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사람들의 연령대가 꽤 높은 편이어서 나는 그녀와 대화하는 게 상대적으로 편했다. 그것은 그녀도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1차 자리가 끝나고 2차를 가자며 움직이는 사이, 나는 선생님에게만 슬쩍 가겠다고 말씀드리곤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담배를 피워 물며 거리를 지켜봤다. 연말이어서 사람들은 다들 들뜬 분위기였고, 그것은 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주변 환경이 그러하면, 그 세계에 발을 딛고 사는 존재들도 덩달아 그러하게 되는 거다. 그게 싫다면 아주 무거운 추 하나를 품에 안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런 추를 구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기에, 다들 덩달아 들뜬 마음으로 연말을 보내는 거겠지, 아무튼……
발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뒤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학교 쪽으로 가세요?”
그럴 참이었으나 말하는 의도를 알 수 없어 가만히 서 있는데,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쪽에 제가 잘 아는 데가 있거든요. 가세요, 제가 한 잔 살게요.”
그렇게 그녀와 학교 앞까지 왔다. 그 동안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 상황을 정리하려 했다. 다른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 내가 다니는 학교 앞에 아는 데가 있다며 데려가는 상황이 자주 일어날만한 일은 아닌 것이다. 택시가 멈추고 그녀가 다 왔다며 먼저 내렸다. 여기랍니다, 라고 말하는 그녀가 가리킨 곳은 ‘풀 하우스’라는 바였다.
잠시 뒤, 나는 바에 앉아 술을 마셨으며, 그녀는 내 앞에 서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상황을 정리하자면, 그녀는 휴학하고 이 바에서 바텐더로 일하고 있었으며, 내년에는 복학할 예정이었다. 교수님 공연이 있어 사장님께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 나왔다가 마침 나를 알게 된 것이다.
“잘하면 택시를 얻어 타고 올 수 있겠다는 생각에 붙잡았어요. 기분 상하신 건 아니죠? 불쌍한 후배 도와준 셈 치세요.”
사실 불쾌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학교 앞으로 와 가볍게 한 잔 더 할 생각이었으니까. 단 그녀의 당돌함에 조금 놀랐을 뿐이었다. 급기야 이런 말도 하는 게 아닌가.
“대신 제가 한 잔 공짜로 드릴게요.”
작은 목소리로, 사장님께는 비밀이에요, 라고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때 특별한 술을 주겠다며 오래도록 고심한 그녀가 꺼내온 술이 바로 베네딕틴이다.
그 겨울 동안 나는 가끔씩 ‘풀 하우스’에 들렀다(작년 언제쯤인가 이 한라병원보에 <어느 크리스마스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이 바의 이야기를 연재한 적이 있다). 이 가게 사장님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었고, 많은 음악을 들었으며,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또한 내 이야기도 했다.
그녀는 오래 일하지는 않았다. 어떤 극단의 공연에 참여하게 되어 가게를 그만두었다. 한번은 그녀가 공연을 보러 오라며 표를 보내주었다. 공연장에서 만난 그녀는 한층 열정적인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그녀는 처음 만났을 때나 바에서 이야기를 나눴을 때에도 그 자체로 매력적이라고 느꼈는데, 공연장에서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한데 어우러져 꿈을 향해 뛰는 그녀는 한층 빛나보였다. 내 일상 또한 수시로 변했다. 학기를 마치고 약 8개월 동안 제주도에서 지냈고, 그 뒤에는 다시 학교로 복귀해 새로운 해를 맞이했다.
그녀가 떠난 ‘풀 하우스’에는 그 뒤로도 많은 직원들이 들어왔고, 또한 계속 변화하다, 얼마 전 영영 문을 닫게 되었다. 짐을 빼던 날 사장님이 마지막 상자를 나르고선 가게 간판과 조명을 환하게 켜 놓고 사진을 찍던 게 기억난다.
“몇 년을 이 가게 사장으로 있었는데, 사진 한 장 가지고 있지 않아.”
이렇게 사람들은 변하면서 새로운 사실이나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되는 동물인지도 모른다.
그러는 동안 몇 잔의 베네딕틴을 마셨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단 한 가지, 주변으로 인해 혹은 내 마음이 들뜨거나 들썩일 때면 나는 늘 베네딕틴을 마셨다. 그러면 어쩐지 지난 추억들이 하나의 묵직한 추가 되어 들뜬 분위기에 휩싸이지 않도록 나를 지탱했다.
그리고……
한라병원보에 글을 실은 지도 벌써 2년이 되었다.
어떤 분들이 이 글을 읽는지, 그리고 글을 읽은 뒤 어떤 생각들을 하시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한 가지 바람이 있다. 한 달에 한 번 연재하는 글들이 이 글을 읽는 분들에게 베네딕틴 같았으면 좋겠다는 바람. 여러분들이 읽은 이 사소한 이야기가 기억 속에 쌓여 하나의 추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 연말을 따스하게 보내시길,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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