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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아명, 환자의 생명과 건강을 자신의 몸처럼 돌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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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

제주한라병원 2011. 11. 9. 11:14

2010년 / 11월

모임


도우 씨는 퇴근시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사무실에 남아 있었다. 몇몇 동료들이 회식을 하자며 함께 할 것을 권유했다. 금요일 저녁인데다, 날씨가 늦가을의 쌀쌀한 날씨를 때울 작정인 듯했다. 그러나 도우 씨는 할 일이 남아 끝내야 한다고 대충 거절하며 웃음지었을 뿐이다. 그러나 사실 오늘 해야 할 일은 이미 일찌감치 끝냈고, 당분간 바쁠 일도 딱히 없었다. 단지 혼자 있고 싶을 뿐이었다.


인터넷을 뒤지며 잠시 시간을 보낸 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겼다. 사무실에는 아무도 없는 듯했다.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예진 씨의 자리를 쳐다봤다. 그녀의 자리는 어둠이 짙게 내려앉아 있었다. 습관이란 무서운 거라고 도우 씨는 잠시 생각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 그는 사무실을 나설 때면 그녀가 앉은 자리를 쳐다봤고, 그러면 그녀는 아무도 모르게 곧 따라 나가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이제 그런 것은 기대할 수 없다. 그녀는 눈도 마주치지 않는다. 도우 씨는 이제 사무실을 나설 때에 그녀의 자리를 돌아보는 일 따위는 할 필요가 없었다. 아니, 할 수 없었다.


건물 밖으로 나오니 차가운 바람이 피부에 닿았다. 내일은 회사에 나올 필요가 없었다. 도우 씨는 잠시 고민하다 이내 발걸음을 옮겼다. 몇몇 사람들이 왜 혼자 술을 마시냐고 물은 적이 있다. 외로워 보인다면서. 그러나 도우 씨는 외롭다고는 생각한 적이 없다. 오히려 혼자 있을 때 외롭다고 느끼는 것보다, 사람들 사이에서 외롭다고 느끼는 때가 더 비참하다고 생각했다.


잠시 고민에 빠졌던 도우 씨는, 그래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금요일 저녁, 친구들을 만날 시간이었으니까. 
   
*

오래된 술집이다. 벽 한 면에는 길게 바가 붙어 있고, 홀 중앙에는 테이블 몇 개가 놓여 있다. 전체적으로 붉은 조명과 오렌지 색 조명이 빛을 밝히고 있지만 조도가 낮아 가게는 대체로 어둡다. 간혹 손님들이 피우는 담배 연기가 불빛에 비쳐, 아주 가끔씩 희뿌연 안개가 떠다니거나 혹은 가게 전체가 꿈틀거린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일행 중 세 번째로 도착한 것은 ‘저녁 8시부터 새벽 2시까지의 나’였다. 이 술집 단골이었기 때문에 몇몇 아는 얼굴들을 향해 인사했고, 이내 ‘오후 3시부터 저녁 8시까지의 나’가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그들은 빛이 거의 들지 않아 가게의 유일한 틈처럼 보이는 구석 자리에 앉아 있었다. ‘저녁 8시부터 새벽 2시까지의 나’가 그들 앞에 앉았다. 테이블에 빈 병 몇 개가 세워진 것을 보니 벌써 마시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막 들어온 ‘저녁 8시부터 새벽 2시까지의 나’가 생맥주를 주문한 것 외에 그들 사이에는 별 대화가 오고가지 않았다. 그러는 중에 ‘아침 6시부터 오후 3시까지의 나’가 도착했다. 이것으로 대충 멤버는 꾸려진 셈이다. 물론 그들 스스로도 다 모인 것인지, 아니면 일행이 더 있는지 확신하지 못했다. 이번 모임은 ‘나’의 주도하에 모인 것이었다. 언제나 모임의 주최자는 ‘나’였으나 그 멤버는 매번 달랐다. 이번 모임은 한두 달 사이 제일 자주 만났던 게 이들이었기 때문에 성사된 거나 다름없다. 이번 모임에도 역시나 ‘나’는 오지 않았다. 늘 그랬다. 모임을 주최하고서도 한 번도 나온 적은 없었던 것이다. 모두가 그의 존재를 확신하면서도 어렴풋이 느낄 뿐, 한 번도 본 적은 없었던 것이다.

 

“정말 ‘나’의 생각을 모르겠어.”
‘오후 3시부터 저녁 8시까지의 나’가 투덜거렸다. 모두가 그를 쳐다봤다.
“다들 마찬가지겠지만, 그 시간에 그녀와 얼굴을 마주보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웃어야 하는지, 없는 사람처럼 모른 체 해야 하는지……”
“다들 마찬가지야. 어쩌겠어. 하긴 너는 직접 마주치니 더 그렇겠네. 나야 늘 생각 속에서만 보니……”
“그 사람도 답답하긴 마찬가지일 거야. 어떤 때는 웃고 말하고, 어떤 때에는 휙 그냥 지나가버리니까. 그런데 내가 뭘 어떻게 하겠어. 나도 잘 모르겠는걸.
“그래, 우리가 무슨 죄야. 다 ‘나’ 때문인 걸. 그런데 너희들은 ‘나’를 본 적이 있어?”
“본 적 없어. 그래도 ‘나’가 있으니까 우리들이 이렇게 모이는 거 아냐?”
“그래, 늘 느끼기는 하니까.”

그들은 오래도록 술을 마신다.


누군가는 가게 메모지에 낙서를 하고, 누군가는 일 걱정을 하고, 누군가는 자신이 알고 있는 자신이 진짜 자신인가를 생각하고, 또 누군가는 앞으로 그들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고민한다. 그러면서 모두 ‘나’를 기다리고, 그러나 언제쯤 나타날지는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단지 묵묵히 맥주를 들이킬 뿐이다. 그들은 모두 ‘나’를 기다리고, 언젠가 그 모습을 드러낼 거라고 확신하지만, 언제쯤이 될지, 또 그게 어떤 모습일지 아무도 예상하지는 못한다.

 

*

가게에서 나온 도우 씨는 집으로 향한다. 몇몇 사람들이 왜 혼자 술을 마시냐고 물은 적이 있다. 외로워 보인다면서. 그러나 도우 씨는 그걸 외롭다고는 생각한 적이 없다. 오히려 혼자 있을 때 외롭다고 느끼는 것보다, 사람들 사이에서 외롭다고 느끼는 때가 더 비참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자 궁금해졌다. 그런데, 그 외로움을 느끼는 온전한 모습의 ‘나’는 언제 볼 수 있는 걸까,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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