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한라병원

이명아명, 환자의 생명과 건강을 자신의 몸처럼 돌본다

병원매거진/이태훈세계여행

빈센트 반 고흐가 사랑한 도시, 프랑스 아를

제주한라병원 2023. 8. 1. 10:08

기원전 1세기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 시절에 건축된 아를 원형 경기장

 

빈센트 반 고흐가 사랑한 도시, 프랑스 아를

 

 

론강, 크라우 평원, 길들지 않은 땅 등 빼어난 자연환경을 품고 남프랑스에 위치한 아를은 인구 5만의 작은 도시이지만 이탈리아처럼 원형 경기장, 고대 극장, 공동목욕탕, 개선문 등 로마 유적이 도시를 가득 메울 정도로 유서 깊은 문화의 도시이자 빈센트 반 고흐의 열정이 스민 예술의 도시로 유명하다.

 

도시의 역사는 BC 800년경 스페인과 이탈리아 북서부 일대에 거주한 리구리아인이 정착하면서 시작되었다. 뒤를 이어 켈트족과 페니키아인들이 차례로 살았고, BC 123년부터는 퇴역한 로마 군인들을 위한 식민 도시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로마의 유적과 중세풍의 고풍스러움이 혼재된 아를은 반 고흐가 오기 전까지는 잊혀 가는 도시 중 하나였다.

 

1888년 2월 19일 일요일 오후 9시 40분, 반 고흐는 파리에서 마르세유까지 가는 급행열차를 탔는데 갑작스럽게 내린 폭설로 여정 중간에 멈추게 되었고 운명처럼 아를을 만나게 되었다. 날씨 때문에 며칠을 지내면서 아를의 론강과 로마 유적 그리고 소박한 도시 분위기에 만족한 반 고흐는 결국 마르세유에 가지 않고 아를에 머물게 되었다. 자신이 꿈꾸던 유토피아가 아를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었을까? 그는 1888년 2월 20일부터 1889년 5월 8일까지 머물며 ‘포럼 광장의 카페테라스’, ‘아를 요양원의 정원’, ‘아를의 반 고흐의 방’, ‘론강 위의 별이 빛나는 밤’, ‘아를의 원형 경기장’, ‘아를의 랑그루아 다리’, ‘해바라기’ 등 유화 200점, 드로잉과 수채화 100점 등 약 300여 점의 그림을 그렸고 동생 테오에게는 200여 통의 편지를 썼다.

 

반 고흐는 공동체 작업을 위해 아를로 내려온 것이지만 우리는 444일 동안 아를에서 머물며 예술혼을 불태웠던 그의 흔적을 찾기 위해 이 도시를 찾는다. 매일같이 도시 구석구석을 산책한 반 고흐처럼 작품 탄생 배경지를 따라 여행하는 것이 백미이기도 하거니와 반 고흐의 순수한 영혼을 만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의 흔적을 찾아가는 여행은 구시가지 가장 북쪽에 있는 기차역에서 시작된다. 아를역에서 남쪽으로 5분 정도 걸으면 그의 대표작이 그려진 노란 집과 라마르틴 광장이 나오고 노란 집에서 5분 거리에 원형 경기장이 있으며 그곳에서 서쪽으로 5분 거리에는 포럼 광장과 카페 드 라 가르가 있다. 포럼 광장에서 남서쪽 10분 거리에는 반 고흐가 정신 치료를 위해 입원했던 아를 시립병원이 있고 구시가지 남쪽 끝에는 그가 도착하자마자 다섯 점의 작품을 그린 랑그루아 다리가 있다. 이 외에도 밤에 가볼 만한 론강이 여행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오르세 미술관이 소장한 ‘론강 위의 별이 빛나는 밤’의 배경이 된 론강은 외로움에 시달리던 반 고흐의 몸과 마음을 정화해 준 장소이다. 노란 집 근처에 있는 론강은 반 고흐가 1888년 9월 중순에 강과 밤하늘을 배경으로한 작품을 탄생시킨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그날의 감흥을 잊지 않기 위해 동생 테오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밤에 별이 빛나는 하늘인데 사실은 가스등 밑에서 그렸다. 하늘은 녹주석, 물은 로열 블루, 땅은 접시꽃 빛깔이고 마을은 파랑과 보라색, 가스등은 노란색, 반사된 색깔은 적갈금색에서 청동색으로, 하늘에는 큰곰자리가 녹색과 핑크로 반짝이며 조심스럽고 창백하게 잔인한 금빛의 가스등과 대비되고 있지. 가장 앞에는 화려한 연인 두 명이 서 있다.”

 

밤마다 론강을 서성거리며 로열 블루, 아쿠아마린, 청동색 등 다양한 빛을 찾아낸 반 고흐는 지금도 포럼 광장에서 영업 중인 ‘밤의 카페(Cafe la Nuit)’를 대상으로 ‘포럼 광장의 카페테라스’를 그렸다. 이 작품도 아주 마음에 들었는지 여동생 빌레미나에게 “푸른 밤, 카페테라스의 커다란 가스등이 불을 밝히고 있어. 그 위로는 별이 빛나는 파란 하늘이 보여…. 검은색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아름다운 파란색과 보라색, 초록색만을 사용했어. 그리고 밤을 배경으로 빛나는 광장은 밝은 노란색으로 그렸단다. 특히 이 밤하늘에 별을 찍어 넣는 순간이 정말 행복했다.”라고 편지를 보냈다.

 

아를에서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반 고흐의 색채는 더욱 강렬해지고 밝은 분위기로 변했다. ‘감자 먹는 사람들(1885)’에서 보여준 어둡고 칙칙한 색채 대신 노랑, 보랏빛 청색, 담자색 등 자신만의 색채를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반 고흐의 화풍은 아를의 환상적인 날씨처럼 밝고 아름답게 빛나기 시작한 것이다.

 

반 고흐의 흔적 중 가장 가보고 싶은 장소는 그의 작품 속에도 많이 등장하는 노란 집인데 아쉽게도 1944년 제2차 세계대전 때 폭격을 맞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1888년 5월 반 고흐는 방이 4개가 있는 노란 집을 임대하였다. 처음부터 이곳에서 생활한 것은 아니고 공동체 작업을 위한 스튜디오로 사용하다가 9월 초부터 노란 집으로 이사한 뒤 대담한 색상과 역동적인 붓놀림으로 자신만의 화풍을 만들었다.

 

반 고흐에게 있어 노란 집은 자신의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샹그릴라였다. 파리에서 느껴보지 못한 예술의 본질 속으로 한 걸음씩 천천히 들어가면서 화가들의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는 확신에 매일 즐겁고 행복했다. 그러나 공동체에 참가한 화가들은 없었고, 1888년 10월 23일 동생 테오의 주선으로 합류한 폴 고갱이 유일했다.

 

고갱이 아를에 머물던 9주 동안 반 고흐는 36점, 고갱은 21점의 유화를 각각 그렸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서로 다른 화풍과 기질 그리고 미학에 대한 동떨어진 인식 등 공동체 작업에 방해가 되는 요소가 한둘이 아니었다. 끝없는 토론을 통해 서로의 관계를 극복하려고 노력했지만, 12월 23일 고갱이 파리로 떠남으로써 반 고흐의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그날 밤 이후 반 고흐는 자신의 왼쪽 귀의 일부를 잘라 매춘부에게 주는 등 정신질환에 시달렸고 아를 시립병원에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였다.

 

고갱과의 이별은 반 고흐에게 너무나 큰 상처로 남았다. 단순히 친구와 헤어진 것이 아니라 자신이 꿈꾸었던 공동체 작업을 통해 이루려한 예술에 대한 미래가 사라진 것이었다. 희망이 없는 아를에서 반 고흐의 몸과 마음은 더욱 피폐해졌고 예술에 대한 열정마저 식어갔다. 1889년 5월 8일, 동생 테오는 반 고흐를 생 레미 드 프로방스에 있는 정신병원으로 옮겼고 병실 하나를 더 얻어 작업실로 꾸며주었다. 이것으로 반 고흐와 아를은 영원히 이별했지만, 생 레미 정신병원에서 ‘별이 빛나는 밤’, ‘아를의 반 고흐의 방’ 등 자신이 좋아했던 아를을 추억하며 행복했던 순간들을 화폭에 담았다.

 

 

 

높이 21m,길이 136m에   2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고대 경기장.

 

1888년 반 고흐가 경기장을 관람 후 그린   ‘아를의 원형 경기장’

 

프랑스에서도 로마 유적지가 많이 남아 있는 아를의 도시 전경.

 

남프랑스 특유의 낙천적인 분위기가 연출되는 도시,   아를.

 

중세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아를 시민들의 안식처,   생 트로핌 교회.

 

1888년   9월 반 고흐가 이사한 후 그린   ‘노란 집’

 

제2차 세계대전 때 폭격을 맞아 없어진 노란 집의 실제 모습.

 

폴 고갱과 헤어진 후 자신의 귀를 자른 반 고흐와 그의 자화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