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록담에서 흰사슴을 타고 있는 신선
지금은 한라산에 노루 밖에 없지만 옛날에는 사슴이 많아서 장졸(將卒)을 동원하여 사냥을 하고 그것을 공물로 바치기도 했고, 시인묵객들은 신선사상과 관련 지어서 백록선인(白鹿仙人)이라고 흰 사슴을 탄 신선에 대해 노래했다. 사실 신선 사상은 우리들 인간이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살고픈 욕망에서 나온 유토피아적 발상이다. 그만큼 현실에서 가진 것들이 귀하고 소중하여 두고두고 그것을 영원히 누리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은 사람 마음을 그리 알아주지 못한다.
『열자(列子)』는 말한다. 삶이란 그것을 귀중히 한다고 해서 존속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몸이란 그것을 사랑한다고 해서 두터이 건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을 귀중히 여겨도 그렇지 않으며, 그것을 천대하여도 또한 그렇지가 않다. 자연히 생존하고 자연히 죽으며, 자연히 건강해지고 자연히 박약(薄弱)해지는 것이다. 결국 ”스스로 자라는 것은 증가하는 게 아니며, 스스로 짧아지는 것은 손실이 아니다. 사람의 계산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다“.
1463년(세조 9) 2월 제주(濟州)에서 한 마리 흰 사슴을 바쳤다. 흰 사슴은 무척 희귀하여 신선이 타고 다니는 영물(靈物)로 여겨졌다. 신선과 백록의 관계를 엿볼 수 있는 말에는 “노자(老子)가 흰 사슴(白鹿)을 타고 내려와 이모(李母)를 통해 태어났다”, “선인(仙人) 한중(閑中)이 흰 사슴이 끄는 수레(白鹿車)를 타고 다녔다”는 등의 기록이 전해온다. 사슴은 학과 더불어 십장생 중 하나다. 수천 년을 사는 장수의 영물이 된다. 사슴은 천년을 살면 청록(靑鹿)이 되고 500년을 더 살면 백록(白鹿)이 되고 500년을 더 살면 흑록(黑鹿)이 되는데 검은 사슴은 뼈도 검어 이를 얻으면 불로장생한다고 여겼다.
실제로 18세기에 그려진 제주지도에는 백록담 가운데에서 흰사슴을 타고 윤노리 나무 회초리를 든 신선이 한가하게 사슴 무리에게 물을 먹이고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사슴테우리인 셈이다. 못은 바람에 잔물결이 일렁거리고 있고 좌측 물가에 활을 들고 매복한 응큼한 사냥꾼이 사슴을 노리고 금방 화살을 쏠 기세다. 백록담의 신선 그림 소재는 18세기 두 개의 지도에서 패턴이 비숫하게 그려진 것으로 보아 백록 전설에 대한 어떤 스토리텔링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1577년(선조 10) 백호(白湖) 임제(林悌, 1549~1587)는 과거에 급제하여 당시 제주목사였던 아버지 임진(林晋)에게 급제 인사차 제주에 왔다가 섬을 둘러보고 「남명소승(南冥小乘)」이라는 글을 남겼다. 백호는 1578년 2월 12일 구름이 짙게 끼어서 정상에 오르지 못하고 영실 존자암에서 머물고 있을 때 노승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여름밤에는 사슴이 못가로 내려와 물을 마시곤 합니다. 근래에 산척(山尺:사냥꾼)이 활을 가지고 못가에 엎드려 엿보니 사슴이 떼로 몰려와서 그 수효가 백 마리인지 천 마리인지 셀 수 없는 지경인데 그 중 한 마리가 제일 웅장하며 털빛도 흰빛을 띠었습니다. 이 사슴의 등 위에는 백발노옹이 타고 있었지요. 산척은 놀랍고 괴히 여겨 감히 활을 쏘지 못하다가 뒤에 처진 사슴 한 마리를 쏘아 잡았습니다. 이윽고 노옹이 사슴 떼를 점검하는 것 같더니 한가락 휘파람을 불고는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답니다.”이 이야기는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峯類說)』에도 실렸고, 백호 임제로부터 282년이 지나 1860년 우암(寓庵) 남구명(南九明)의 저서에 의해 약간 변형돼 전해온다.
한라산 백록담의 옛 이름은 백록홍(白鹿泓). 못이 높은 곳에 있어 맑고 깊다는 의미를 더했다. 맑은 것은 백색의 순수한 이미지요. 깊다는 것은 그윽하고 심오하다는 표현에 걸맞다. 백록담 북쪽 가에는 가뭄이면 비오기를 기원하던 도교식 ‘도우단(禱雨檀)’이 있었고 거기서 조선 초기까지 실제로 제사를 지내다가 제사에 참여한 사람들이 겨울 추위에 자주 동사(凍死)하자 해발 400고지 아래 산천단으로 제사를 옮겼다. 백록담은 하나의 커다란 솥모양의 연못인데 신선은 백록을 타고 마치 사슴들을 양떼처럼 몰고 와 그곳에서 물을 먹이곤 했다. 백록 신선은 수염이 길고 회초리를 들고 있으며 휘파람을 잘 분다. 무위자연이야말로 인간의 길이 아닐까. 인간의 시작도 자연이었기에 끝내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 해가 뜨고 지는 것처럼 우리의 삶은 자연스런 귀향풀이가 되는 것이다.
흰 사슴은 귀한 만큼 매우 상서롭게 여겨져 자연 상태에서는 쉽게 볼 수 있는 동물이 아니었다. 과학적 인식이 부족한 시절 흰사슴은 백록선인이라는 전설을 만들어 낸 주인공이었고 한라산 정상에서 남극노인성을 볼 수 있다는 데서 장수 신앙의 영산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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