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토니아 타르투
중앙광장에서 시작된 구시가지 여행, 키스하는 동상분수대 인기
시민들과 삶의 궤적을 함께 한 바실리카 양식의 대성당도 눈길
1989년 8월 23일,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3국의 국민은 서로의 손을 잡고 자주권 회복을 위해 670km의 ‘발트의 길’을 만들었다. 흔히 ‘인간 벨트 독립운동’이라 불리는 발트의 길은 1939년 8월, 구소련과 나치 독일이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이라는 비밀 협정을 맺고 발트 3국을 분할 점령을 했는데, 이에 대한 독립 시위를 말한다. 역사적인 그날을 함께 한 에스토니아인들은 ‘바바두스’, 라트비아인들은 ‘브리비바’, 리투아니아인은 ‘라이스베스’라고 외쳤다. 비록 서로의 언어는 다르지만, 단어의 뜻은 모두 ‘자유’였다. 이 중에서도 에스토니아 독립투쟁의 선봉장을 선 타르투 시민들과 대학생들은 목숨을 걸고 아주 강렬하게 저항하였다. 그럼 에스토니아의 수도인 탈린의 시민이 아니라 우리에게도 생경한 타르투 시민들이 왜 시위 맨 앞줄에 섰을까?
우리에게 아주 낯선 타르투는 에스토니아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로, 탈린에서 남동쪽으로 186km 정도 떨어져 있다. 도시 한 가운데로 에마외기강이 흐르는 타르투는 1030년 키예프(키이우) 대공국의 야로슬라프 1세에 의해 도시가 건설됐는데, 이는 탈린보다 200여 년 이 앞선 것이다. 그 결과 에스토니아의 대법원, 교육부, 국립박물관, 국가기록원 등이 수도 탈린이 아닌 타르투에 있고, 이런 이유로 타르투 시민들이 에스토니아를 대표해 독립 시위 때 맨 앞에 선 것이다.
문화와 지성의 도시로 불리는 타르투 구시가지는 탈린처럼 고지대와 저지대로 나뉘는데, 고지대는 ‘토메매기’라 불리며 야트막한 산으로 타르투 대학과 관련된 유명인들의 동상, 천사의 다리, 악마의 다리, 대성당이 있다. 대부분의 여행지는 중앙광장과 시청사를 중심으로 타르투 대학, 에스토니아 국립박물관, 카페, 호텔 등이 저지대에 있다.
우선 타르투의 여행은 붉은 지붕이 인상적인 중앙광장에서 시작한다. 시청사가 있어 ‘시청광장’이라고도 불리는 중앙광장 앞은 가장 화려하고 활력이 넘쳐난다. 아기자기한 카페와 레스토랑이 들어서 있고, 매일 정오와 오후 6시가 되면 시청 종탑에서는 차임벨 연주가 펼쳐진다. 무엇보다 시청광장에서 제일 인기 있는 것은 우산을 쓰고 젊은 남녀가 키스하는 동상 분수대이다. 일명 ‘키스하는 학생’이라고 불리는 이 동상은 타르투를 상징하는 이미지이다. 분수대는 1948년에 이미 조성됐고, 1998년 사랑에 빠진 두 학생이 빗속을 거닐다 우산 아래서 키스하는 모습의 동상이 세워졌다. 오래된 동상은 아니지만, 이 동상과 관련해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가 전설처럼 내려온다. 어느 날 사랑에 빠진 젊은 남녀가 구시가지를 걷다가 시청 앞에 도착하자마자 갑자기 하늘에서 거센 소나기가 휘몰아쳤다. 남학생은 재빨리 우산을 펴고 여학생을 우산 안으로 껴안으며 뜨거운 키스를 했다. 그런데 사랑하는 두 연인은 벼락을 맞아 돌이 돼 영원히 헤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런 전설 때문인지 ‘키스하는 학생’ 동상 앞에서는 매년 커플들이 동상처럼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포옹하는 경연 대회가 열린다.
시청사와 키스 동상을 뒤로하고 야트막한 길을 따라 한 걸음 더 깊숙이 들어가면, 이 도시의 자랑거리이자 에스토니아를 대표하는 상아탑, 타르투 대학교에 이른다. 1909년 노벨 화학상을 받은 프레드릭 빌헬름 오스트발트, 천문학의 대가 프리드리히 폰 슈트루베, 기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유리 로트만, 발생학의 카를 베어 등이 바로 타르투 대학 출신이다. 에스토니아에서 가장 큰 규모의 국립대학인 타르투는 스웨덴 지배 시기인 1632년,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2세가 설립하였고, 그 당시 북유럽과 러시아, 발트 3국 전체에서 손꼽히는 명문 대학으로 성장하였다. 초기에 타르투 대학은 독일인만 입학이 가능해 독일 출신의 프레드릭 빌헬름 오스트발트와 카를 베어가 이 학교에 다녔지만, 19세기 이후 에스토니아 학생들도 입학이 허락되었다. 그 후 타르투 대학교는 에스토니아의 지성을 상징하는 학문의 전당으로 성장하였다.
하얀 기둥 6개가 받치고 있는 본관 건물은 마치 그리스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을 연상케 한다. 별도의 입장료가 있는 본관에는 박물관도 있고, 입학식과 졸업식이 거행되는 강당, 맨 꼭대기 충에는 하이델베르크처럼 학생 감옥도 있다. 외출한 뒤 늦게 들어오거나 기숙사 내에서 술을 마시면 학생 감옥에서 근신하면서 며칠 동안 생활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 대학 본관에는 하얀색, 청색, 검은색의 에스토니아 국기가 게양된다. 이 깃발은 발트 3국의 민족운동 때 타르투 대학생들이 사용하던 것을, 19세기 러시아로부터 독립할 때 에스토니아의 국기가 되었다.
대학 건물을 나와 고지대로 올라가면 이 도시의 시민들과 삶의 궤적을 함께 한 대성당이 눈에 들어온다. 대성당은 ‘어머니의 강’이라는 뜻을 가진 에마외기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언덕에 세워졌다. 13~15세기에 건축된 성당은 에스토니아 최대의 바실리카 양식의 건물로 몇 차례의 전쟁과 화재로 인해 파괴되었다. 현재는 그 일부분 복원되어 타르투 대학교 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성당 아래로 내려오면 재미있는 전설의 다리가 나오는데, 일명 ‘천사의 다리’와 ‘악마의 다리’가 그 주인공이다. 우선 천사의 다리는 1816년 요한 빌헬름 크라우제가 타르투 대학의 첫 번째 총장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폰 파로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다리 주변에 영국 정원이 조성됐는데, 여기서 영국을 뜻하는 ‘잉글리시(English)’와 에스토니아어로 발음이 비슷한 ‘천사(Ingli)의 다리(sild)’로 명명된 것이다. 반대로 악마의 다리는 1913년 러시아제국의 로마노프왕조 3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다리의 이름은 어디서 유래됐는지 확실하지 않다. 반대편에 천사의 다리가 있어 붙여졌다는 말도 있고, 이 다리를 설계한 건축가의 이름이 베르너 죄게 폰 만토이펠인데 그의 이름 ‘만토이펠(Manteuffel)’을 영어로 번역하면 ‘악마(Man-devil)’이다.
비록 여행지가 많지 않고 도시의 규모도 작지만, 젊은 학생들의 패기로 가득한 타르트는 자유를 사랑하고,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오롯이 지키고 사는 도시이다. 폭력과 억압을 외면하지 않고, 정의를 위해 타르투 대학생들이 있는 한 이 도시와 에스토니아는 영원히 자유를 누릴 것이다.
.
.
'병원매거진 > 이태훈세계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크 트웨인이 사랑한 도시, 독일 하이델베르크 (0) | 2023.01.31 |
---|---|
카스티야 왕조가 사랑한 중세의 도시 (0) | 2022.11.30 |
번지 점프와 여왕의 도시 (1) | 2022.09.29 |
색체의 대가 ‘앙리 마티스’가 사랑한 도시 (0) | 2022.08.29 |
중국풍·유럽풍이 혼재한 독특한 전통의 도시 (0) | 2022.08.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