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한라병원

이명아명, 환자의 생명과 건강을 자신의 몸처럼 돌본다

병원매거진/이태훈세계여행

중국풍·유럽풍이 혼재한 독특한 전통의 도시

제주한라병원 2022. 8. 2. 14:15

‘하노이의 심장’이라는 불리는 서호는 ‘호안끼엠 호수’라고도 불린다.

 

 

베트남의 하노이

 

‘강과 호수’가 많아 하내, 역대 왕조에서 수도 역할 지속

공자 사당인 문묘 …베트남 정신세계 엿볼 수 있는 공간

 

동남아시아에서 떠오르는 베트남의 대표적인 음식은 쌀국수이다. 우리에게는 맛있는 쌀국수이지만, 베트남의 어두운 역사를 담고 있는 음식이다. 밀가루가 아닌 쌀로 만든 면은 예로부터 중국의 지배를 받아서 생긴 것이고, 국물은 1887년부터 1954년까지 프랑스 통치 시대에 수프 문화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한 걸음 더 과거의 역사로 들어가면 베트남은 7세기 무렵 당나라 시대에 윈난성과 남중국을 연결하는 교역로 발달했는데, 이때 당나라는 베트남 하노이에 안남도호부를 설치하여 베트남의 북부와 중부를 다스렸다. 1257년과 1285년 그리고 1287년에 30만 대군을 이끌고 몽골제국이 베트남을 침략했지만, 베트남의 구국 영웅 쩐흥다오 장군과 국민이 단결하여 3번의 침략을 모두 막아냈다. 그 당시 고려는 몽골제국의 침략을 받아 100년 가까이 지배를 받았지만, 베트남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몽골제국을 물리쳤다. 이런 자긍심은 프랑스 식민지에서 벗어날 때도 마찬가지였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일본의 패망으로 자연스럽게 아시아 국가들이 독립했지만, 베트남은 1954년 프랑스와 전쟁을 통해 독립한 아시아에서 유일한 나라이다.

최근 들어 우리나라와 베트남은 형제의 나라로 칭할 만큼 한류가 크게 인기를 끌고, 더 나가 두 양국 간의 교류가 많아졌다. 그러나 1960년부터 1975년까지 베트남 전쟁, 일명 ‘월남전’을 치를 때 우리나라가 미국과 함께 전쟁에 참여해 본의 아니게 두 나라의 젊은이들이 총을 겨누었다. 이데올로기 때문에 불과 50여 년 전만 해도 적이었던 두 나라가 어두운 과거를 뒤로하고 우호적 관계로 발전하였다. 베트남 거리에서 쉽게 우리나라 대기업의 간판과 빌딩을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우리나라와 베트남의 무역 교역량은 중국과 미국 다음으로 많다. 또한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을 우리나라 출신의 박항서 감독이 맡을 정도이니 양국 간의 친밀함은 두 말이 필요 없을 것이다.

우리와 비슷한 유교적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하노이는 한자로 ‘하내(河內)’라고 하는데, 옛 지명은 ‘탕롱(승룡-昇龍)’이라고도 불렀다. 예로부터 ‘강과 호수’가 많아 하내로 불린 하노이는 리 왕조, 쩐 왕조, 전례 왕조 등 베트남 역대 왕조가 지속해서 수도로 삼았던 도시이자, 베트남 전쟁 후 통일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도가 된 곳이기도 하다. 인구 220만 명이 사는 하노이는 베트남의 정치·경제·문화·식품·화학·섬유 등의 중심지이고, 19세기 프랑스 식민 시절 때 프랑스풍의 건축물이 많아 ‘리틀 파리’로도 불렸다. 쌀국수처럼 중국의 영향을 받은 중국풍의 건축물이 유럽풍의 건축물과 어우러져 베트남만의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냈다.

유구한 유교 문화와 근세의 프랑스 문화가 만들어 낸 베트남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 하노이 중심 거리에 쏟아진 수많은 오토바이 행렬, 도시마다 넘쳐나는 젊은이들의 활력 등이 21세기 베트남의 현주소다.

하노이 시민들의 손과 발이 되는 오토바이 행렬.

 

하노이 여행에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호수이다. 도시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과거 하노이에는 크고 작은 호수가 많았다. 지금은 그 중심에 역사적인 전설과 설화가 깃든 호안끼엠 호수가 있다. 과거 중국 명나라가 침략했을 때 레 러이가 장군이 호안끼엠 호수에 사는 큰 거북이로부터 칼을 받아 물리친 뒤 후 레 왕조를 세웠다. 그 후 레 러이가 다시 호수에 사는 거북이에게 칼을 돌려줬다는 전설이 내려와 호수 이름을 한자로 ‘환검(還劒)’이라 쓰고, ‘호안끼엠’이라고 읽는다.

 

두 번째로 가볼 만한 곳은 하노이에서 만나는 공자의 사당인 문묘이다. 이곳은 1442년부터 1787년까지 과거에 합격한 사람의 명단이 새겨져 있어 1,000여 년의 베트남의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는 공간이다. 그 이외에도 프랑스 식민 시절에 건축된 오페라 하우스가 있고,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을 모델로 지은 성 요셉 성당도 있다. 이 건물들은 유럽풍의 바로크 양식과 신고딕 양식으로 지어져 전통적인 목조 건물과 대조를 이뤄 하노이만의 아름다운 건축 문화를 보여준다.

 

1070년 공자와 그의 제자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문묘’

 

1911년 파리의 국립 오페라 하우스를 모델로 건축된 ‘하노이 오페라 하우스’

 

마지막으로 하노이에 왔다면 호찌민과 관련된 유적들을 둘러볼 차례이다. 베트남 건국의 아버지이자 ‘호 아저씨’라고 불릴 정도로 베트남에서 가장 존경받은 인물이 바로 호찌민이다. 현재 하노이에는 베트남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던 바딘 광장에 그의 묘가 있고, 인근에는 1990년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호찌민 박물관도 있다. 또한, 1954년 프랑스로부터 독립한 후 1958년부터 1969년 사망할 때까지 살았던 살림집도 일반인들에게 공개하고 있다.

1969년 사망 후 방부처리 된 호찌민의 시신을 볼 수 있는 ‘호찌민 묘’

 

과연 호찌민은 어떤 인물일까? 평범한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난 호찌민은 초등학교 교사를 하다가 21세 나이에 프랑스의 6,000톤급 증기선(船) 아미랄 라투슈 트레빌 호의 수습 요리사로 승선, 프랑스에 건너갔다. 이듬해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과 보스턴에서 살면서 호텔 주방에서 빵 굽는 일을 하며 흑인 인권운동에 가담했었다. 1914년에는 영국 런던으로 건너가 하인과 수습공으로 생활했고, 1917년부터 1918년까지 미국으로 다시 건너가 제너럴 모터스(GM)에서 영원사원으로 일했다. 29세 때 프랑스로 돌아와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하면서부터 그의 인생은 베트남 독립을 위한 첫걸음이 시작됐다. 이때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회의 회원이었던 김규식 선생을 비롯해 독립군과 호찌민이 교류를 했었다. 그 후 구소련의 모스크바에서 공부한 뒤, 40세 때 중국에서 베트남 공산당을 창건하면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마침내 1954년 프랑스로부터 독립을 일궈냈다. 하지만 1960년부터 미국과 소련이 참가한 베트남 전쟁이 발발하면서 북베트남의 최고 군사 지휘관으로 참전했지만, 안타깝게도 호찌민은 1969년 9월 2일 베트남의 통일을 눈앞에 두고 심장질환으로 사망하였다.

‘호찌민’이라는 이름은 ‘깨우친 자’라는 뜻으로, 그는 생전에 160여 개의 필명으로 활동했었다. 20대 초반 고국을 떠나 선원으로 프랑스, 알제리, 튀니지, 콩고 등의 프랑스 식민지와 미국, 영국, 이탈리아 등 유럽 전역을 다니면서 베트남을 프랑스로부터 독립해 자주권 국가로 만들고 싶었다. 정원사, 청소부, 노동자, 웨이터, 댄서, 식당 종업원, 선원, 영업 사원 등 허드렛일을 하면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젊은 시절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고, 마침내 베트남의 자주권을 회복했다. 이런 이유로 그는 현재까지 베트남에서 가장 존경받은 인물이 되었고, 그의 검소한 생활은 그의 명성을 더욱 드높이고 있다.

 

 

 

 

 

베트남 국보 1호 못꼿사원은 하나의 기둥 위에 사당을 얹은 구조이다.

 

 

베트남을 상징하는 전통모자 ‘논’과 오토바이

 

 

 

 

호찌민이 그가 사망할 때까지 11년간 살았던 오두막집.

 

하노이에서 가장 큰 호수인 서호는 시민들의 영원한 안식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