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쓰는 제주 이야기 <31> 도립병원2
병원 흔적은 사라지고 예술공간으로 남아
도립병원은 제주4·3을 전후로 한 역사에도 이름을 남기고 있다. 병원은 사람이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한다. 생사여탈권이 병원에 있는 건 아닐테지만, 늘 병원엔 생과 사의 갈림길이 있다. <제주4·3진상조사보고서>는 4·3의 시작으로 1948년 4월 3일이 아닌, 한해 전인 1947년 3월 1일로 올려잡는다. 제주4·3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배경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해 3월 1일은 제28주년 3·1절 기념일로, 이날 새벽부터 제주 읍내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무장경찰이 배치되고, 그에 대응하는 시위행렬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젊은 사람치고 그날 기념행사에 오지 않은 사람은 없었을 정도였다. 제주도민 3만명이 참여를 했으니, 제주도민 10명 가운데 1명은 3·1절 행사에 나선 셈이다.
경찰은 읍내 곳곳에 배치됐는데, 기마경찰도 분주하게 움직였다. 관덕정 광장에서 기마경관이 탄 말에 어린이가 치어 소란이 발생한다. 오후 2시 50분쯤의 일이었다. 기마경관은 북신로에 있던 감찰청쪽에서 관덕정 옆에 자리잡고 있던 제1구경찰서로 보고하러 가던 중 어린이를 치고 만다. 기마경관은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구호조치를 하지 않고 경찰서쪽으로 향했다. 시위군중은 없던 시각이다. 100명 가량의 구경꾼만 있을 뿐이었다. 그 장면을 본 군중들이 소리치고 몰려왔다. 말을 향해 돌을 던지는 사람도 나타났다. 기마경관은 말을 몰아 경찰서 쪽으로 향하고, 바로 그 순간 총소리가 울렸다. 첫 발포는 관덕정 앞에 배치됐던 무장경관의 총구였다. 경찰서 정문 안쪽의 망루 위에서도 발포가 이어졌다.
희생자는 경찰서와는 먼 거리에 떨어져 있었다. 식산은행 앞 거리와 도립병원으로 들어가는 골목 모퉁이, 관덕정 남쪽 지점의 경찰관사 앞에서 사람들이 쓰러졌다. 피해자는 한 사람만 빼고는 전부 등 뒤에서 총을 맞았다. 모두 6명이 안타까운 목숨을 내려놓는다. 4명은 현장에서 죽고, 2명은 도립병원으로 후송됐으나 목숨을 건지지 못했다. 도립병원이 총에 맞은 사람을 맞아야 하는 순간이다. 일제강점기 때 도립병원도 그런 일은 겪어보지 못했다.
사망자는 박재옥(21·도두리), 허두용(15·오라1리), 오문수(34·아라리), 김태진(38·도남리), 양무봉(49·오라3리), 송덕수(49·도남리)였다. 박재옥 여인은 3개월 젖먹이를 안고 있었는데, 젖먹이 어깨에도 총알이 스쳤다. 젖먹이는 당시엔 생명에 지장이 없었다고 하지만 얼마 안되어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젖먹이까지 포함하면 희생자는 7명이다.
예기치 못한 사고는 도민들의 분노를 샀다. 그러나 미군정청은 사태진압을 위해서는 시위 주동자를 검거하는 게 우선이라는 생각에 응원경찰 증강을 요청하고, 3·1절 기념식을 주도한 민전 간부들에 대한 색출에도 나선다. 민심은 더 흉흉해졌다. 피해자에 대한 구호모금이 이뤄지고, 경찰의 과잉진압에 맞서는 총파업도 진행된다.
<제주신보>는 그해 3월 12일자 사설을 통해 “시위대가 현장에 없었던 사실을 이야기할 증인이 필요하다면 몇십 명이라도 증언케 할 수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제주신보>는 구호모금을 주도했고, 6월 22일자까지 구호모금 기사가 실렸다. 그날 신문엔 서울 출신 제주도민들이 거금 5만원을 내놓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구호모금은 3개월 이상 진행되었고, 도내외 도민들이 내놓은 모금 금액은 317,118원 5전이라고 <제주신보>에 쓰여 있다.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어마어마한 금액임은 분명하다.
당시 제주도에 내려온 경찰은 ‘응원경찰’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다. 3·1절 이후에 제주에 내려온 조병옥 경무부장은 “제주도는 모두 빨갱이 섬”이라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니곤 했다.
제주도민들에겐 더 악랄한 존재도 있었다. 그때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겐 ‘서북청년단(서청)’은 공포와 같다. 제주4·3과 서청의 관계는 떼려야 뗄 수 없다. 4·3 발발 이전에 테러행위 등으로 제주도민의 감정을 자극, 4·3 발발의 한 요인으로 거론된다. 서청의 출현은 3·1 기념식 이후 신임 도지사의 부임과 궤를 같이한다. 제주와 관계없는 유해진이라는 인물이 도지사로 내려오면서 그를 호위하는 이들을 서청으로 채운다. 서청은 테러집단이기도 했다. <미 24군단 정보보고서>는 “서북청년단 제주도단장이 ‘제주도는 조선의 작은 모스크바’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려고 애썼다.”고 기록하고 있다. 서청이 ‘증명’을 하기 위해 자행한 일이 바로 제주도민을 향한 테러였다. 신문사를 접수하고, 부녀자 겁탈사건도 유발했다. 다른 식구들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서청단원들과 정략결혼에 응한 처녀들도 많았다.
제주도내 고위 공직자여도 서청엔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서청의 횡포는 4·3 발발 이후엔 더했다. 1948년 11월 9일 제주도청 김두현 총무국장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총무국장이라면 도지사를 제외하면 가장 권한이 막강한 고위직 공무원이다. 그도 서청엔 밥이었다.
서청은 도민들의 구호용으로 나온 광목 옷감을 자신들에게 많이 배정되지 않는 데 불만이 있었고, 김두현 국장이 자신들의 인사청탁도 들어주지 않는다는 트집을 잡아서 납치한 후 집단구타해서 숨지게 했다. 언론인 하주홍씨는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자신의 아버지는 도립병원에 근무하던 공무원이었다.
“아버지의 말씀을 들어보면 서북청년단 횡포가 이만저만 아니었어. 김두현 국장이 밤새 맞는데, 서청 사무실이 김 국장 누이동생 집과는 가까웠던 모양이야. 밤새 맞는 소리가 나니까 ‘누가 맞암시니?’ 이렇게 생각했는데, 자기 오빠지 뭐야. 그러곤 서청이 김두현 국장을 길거리에 버렸나봐. 새벽에 어떤 사람이 지나가다가 길거리에 버려져 신음하는 사람을 도립병원에 데려왔다고 하더군. 아버지가 보니까 김두현 총무국장이라는 거야.”
제주도립병원은 보지 않아야 할 일도 참 많이 봤다. 나중에 제주의료원으로 이름이 바뀌고, 그 자리에 다시 제주대병원이 들어선다. 자혜병원에서 도립병원, 도립병원에서 제주의료원, 다시 제주대병원이라는 이름으로 바뀐다. 그러다 다시 제주대병원은 그 자리를 뜬다. 지금은 예술공간으로 남아 있다. 조선시대 기억을 살린다는 의미에서 ‘예술공간 이아’라는 이름을 달았다. 그런데 남은 건 없다. 아무런 기억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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