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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들의 고향’ 그 추억은 다 어디로 가버렸나

제주한라병원 2020. 9. 10. 14:52

새로 쓰는 제주 이야기 <28> 제주시내 영화관


‘별들의 고향’ 그 추억은 다 어디로 가버렸나

 

예전엔 영화관이 왜 그리 많았을까. 기억에 지닌 영화관도 꽤 된다. 영화를 봤던 제주시내 영화관으로는 동양극장, 코리아극장, 피카디리극장 등이 있다. 그 외에도 기억에 간직한 영화관으로 제일극장이 있다. 기억을 제대로 푼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영화관이 많던 시대를 살았다. 1960년대와 70년대를 제주시 원도심에서 보낸 이들은 더 많은 영화관과 인연을 맺었다.  그 많던 영화관은 죄다 제주시 원도심에 있었다. 지금 글을 쓰는 이는, 많은 이들이 제주시에서 영화를 볼 당시엔 제주도에 없었다. 여기서 학교를 다니지 않았으니까.


지금은 도심의 확장으로 영화관도 도심의 일부에만 있는 게 아니라, 넓게 분포한다. 달라진 점이라면 지금 영화관은 ‘메가플렉스’로 볼린다. 스크린수가 10여개가 넘는 영화관이다. 거기엔 전용 주차장도 있고, 식당과 카페도 있다. 영화를 보러 가서 이것저것 볼일을 보는 구조이다. 그러고 보면 격세지감이다.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영화관은 좌석제가 아니었다. 표를 끊고 자리를 잘 차지하면 되었다. 영화시간대를 놓쳐서 중간에 들어가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럴 때는 중간부터 보다가 영화가 끝나면 다시 한번 더 영화를 보는 일도 가능했다. 인기만점의 영화는 계단에 앉아서 보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시절이다.


제주도 이야기는 아니지만 대학을 다닐 때는 학교 인근에 싸구려 영화관이 많았다. 몇백원이었는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한번에 두편의 영화를 볼 수 있었다. 당시 내 마음을 사로잡은 영화가 있다. 쥬세페 토르나토레가 감독을 맡은 영화 <시네마천국>이다. 아마도 1989년에 그 영화를 본 것 같다. 싸구려 영화관에서 봤지만 감동은 싸구려가 아닌 최고급이었다. 이후에 본 영화로는 이와이 슌지 감독의 <러브레터>이다. <러브레터>는 앞사람의 뒤통수가 어른거리는 피카디리극장에서 봤다. <러브레터>는 이후로도 몇차례 봤으며, ‘최애 영화’ 가운데 둘째를 차지한다. 이왕 얘기가 나왔으니 ‘최애 영화’ 세 번째는 <보헤미안 랩소디>이다. 그 영화는 대형 스크린으로 봐야 한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만든 영화였다.


1960년대와 70년대는 문화를 누릴 게 많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영화관은 모든 문화행사를 가능하게 만든 곳이다. 스크린은 하나였지만 거기에서 각종 문화행사가 펼쳐졌다. 아울러 영화만큼 젊음을 대변할 문화 키워드가 부족했던 것도 영화관 부흥과 연결된다. 지금이야 스마트폰으로 모든 영상을 보지만, 그때는 영화관이 유일한 눈요깃거리였다.

 

사라진 현대극장

 

아쉽다면 시간의 흐름을 막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예전 모습의 영화관은 차츰 사라지고 있다. 영화관이 사라지니, 영화관을 지키던 건물도 사라지고 만다. 다행히 동양극장 건물은 남아 있다. 동양극장을 설계한 인물은 제주출신 건축가 김한섭이다. 그는 1938년 송정공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이 세운 만주국의 하급 기술자로 파견된다. 그러나 그는 하급기술자로 만족할 수 없었다. 더 배워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학력 극복을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일본 유학시절은 1939년부터 1941년이다. 그 때 오영섭이라는 인물을 만난다. 오영섭은 자긍심이 강한 인물로, 김한섭에게 사상적인 버팀목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한섭을 건축가로 이름을 날리도록 계기를 준 건 1952년이다. 그해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건축가 3명이 해외로 떠난다. 김중업이 르 꼬르뷔지에 밑으로, 김수근이 일본으로, 김한섭도 일본으로 가는 밀항선에 오른다. 김한섭은 일본에서 르 꼬르뷔지에의 제자인 마에가와 구니오를 만나고, 그 때의 충격이 그의 건축에 녹아든다.

 

동양극장은 동문시장의 큰불로 인해 생겨나게 됐다. 동문시장 재건이라는 이름으로 탄생한 복합건축물이다. 겉모습은 어느 항구에 정박한 배를 닮았다. 물결치는 외형은 바다의 멋을 담았고, 둥근 창은 커다란 선박의 객실에서 만나는 그런 모습이다. 바다를 향해 나가려는 것인지, 지친 항해를 마치고 숨을 고른 뒤 다시 먼 항해를 준비하려는 것인지. 현재 이 건물에서 영화는 볼 수 없다. 영화관 기능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건축물로만 한정시킨다면 지켜져야 한다는 말로 대신하겠다.


사라진 영화관이 있는데 두고두고 아쉽다. 옛 현대극장이다. 현대극장 이전엔 제주극장이라는 이름을 달았다. 현대극장은 그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4.3당시 서북청년단의 음습한 기운이 있는 아사이구락부와 연결된다.


제주극장 당시엔 무성영화를 틀었고, 영화인들은 이곳에서 우리나라 첫 영화인 나운규의 ‘아리랑’을 튼 마지막 장소라고도 말한다. 그러다 1960년대에 오면서 현대극장으로 탈바꿈한다. 누가 개축을 했는지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어 아쉽지만 목조건물이던 현대극장은 트러스지붕에 바닥과 벽면은 콘크리트조로 바뀌었다. 이 건물은 보존과 철거 여부를 놓고 다투다 결국은 사라졌다. 보존을 외쳤건만 결국은 붕괴였다. 지금 그 자리는 주차장으로 변해 있다. 주차장으로 만들려고 보존을 외쳤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현대극장이 사라진 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