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쓰는 제주이야기
<32> 제주에 있던 ‘여단’
제주도립병원 이야기를 두 번에 걸쳐 해보았다. 병원 이야기를 하고 나니, 질병이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가뜩이나 지금은 ‘코로나19’라는 바이러스와 싸움을 하고 있지 않은가. 코로나19는 한 지역의 풍토병이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창궐하고 있다. 글로벌 환경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예전은 어땠을까. 우리나라도 글로벌 질병과 싸운 기억을 지녔다. 세계적인 글로벌 질병은 19세기 발생한 콜레라였다. 콜레라는 인도 벵골 지역의 풍토병이었다. 콜레라는 19세기를 맞기 전까지는 인도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만 떠돌았다.
그러다 1817년을 맞는다.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배할 때였다. 캘커타 일대에 콜레라가 번졌고, 1주일 사이에 5000명에 달하는 영국 군인이 죽어갔다.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영국의 선박과 군대는 아주 먼 지역까지 콜레라는 실어날랐다.
콜레라의 번짐을 보자. 영국 군인이 실어나른 콜레라는 1820년부터 1822년에 걸쳐 마구 확산되기 시작했다. 두 갈래로 번졌다. 중동지역과 동아프리카로 번졌고, 다른 하나는 인도 동쪽이다. 인도 동쪽으로 흐른 콜레라는 우리나라까지 찾아온다. 조선에 당도한 콜레라는 중국을 먼저 거쳤다. 1820년 중국 광동에 도착한 콜레라는 이듬해 중국 전역으로 번졌고, 우리나라 의주를 거쳐 황해도와 평안도로 들어왔다. 당시 조선에 당도한 콜레라는 1821년과 1822년 2년간 연이어 발생했다. 처음 한반도에 발생할 때는 제주와는 연관이 없었지만, 1822년 제주도 역시 뚫리고 말았다. 콜레라 유입은 전 세계 질병이 어느 한 곳에만 머물지 않고, 여러 곳곳에 확산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사건이었다. 마치 지금 우리 세대가 겪고 있는 코로나19와 다를 게 없다.
1821년 겨울 들어 잠잠하던 콜레라는 1822년 서울과 강원도, 평안도에서 재차 유행을 하다가 제주도에도 유입된다. 그해 7월에 제주시 조천리를 통해 들어왔다고 기록은 전한다. ≪일성록(日省錄)≫에 따르면 1822년 7월 10일께 들어온 콜레라는 급속하게 번져서 제주목과 대정현, 정의현 등에서 두 달 사이에 1917명이 죽었다고 보고되었다.
삶과 죽음은 일정한 경계가 없던 시절이다. 지금처럼 의학이 발달한 시기에도 코로나19라는 바이러스에 꼼짝하지 못하는 인간이 아니었던가. 이때 임금 순조는 제주도민들을 달래는 교서를 직접 내리기도 했다. 순조는 죽은 사람도 불쌍하지만, 돌림병으로 주변 가족을 잃은 이들 역시 불쌍하게 봤다. 젖을 의지해야 하는 아이는 누가 키워야 했던가. 다음은 순조가 직접 제주도민들을 위해 내린 교서의 일부이다.
“아! 사망자가 속출할 때에는 베로 염하기도 어려울 터인데 널에 넣은 자가 몇 명이나 되겠는가? 너희가 살아서는 제대로 살지 못하였고 너희가 죽어서는 한(恨)만 지니고 가게 하였으니, 이것이 내가 너희를 애처롭게 여기는 바이다. 산에 있는 시신들은 여우들이 짓밟고 골짜기에 묻은 시체는 비바람에 떠내려갈 터인데 혹시라도 뼈를 묻는 정사를 소홀히 한다면 너희가 필시 이마에 땀이 나는 아픔이 있을 것이니, 이것이 내가 너희를 측은하게 여기는 바이다. 비록 돌림병의 기세가 사그라져 마을이 다소 깨끗해졌다고는 하나, 의지할 데 없는 홀아비나 홀어미는 누구를 믿고 살며 젖을 잃은 어린아이는 누가 보호해 기를 것인가? 죽은 사람은 물론 불쌍하지만 산 사람도 더욱 가련하니, 이것이 내가 너희를 딱하게 여기는 바이다. 병을 치료하다가 살림을 없애지는 않았는가? 수확할 때에 시기를 놓치지는 않았는가? 목사의 장계를 본 뒤로는 너희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하고 신음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여 잠들 시간임에도 촛불을 켜고 날이 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 ≪순조실록≫ 25권, 순조 22년 10월 19일 경신.
죽음. 콜레라는 인간을 앗아갔다. 홀로 남기도 하고, 온 가족이 질병의 희생자가 되기도 했다. 제사를 지내줄 이들이 없다는 건 귀신이 된다는 의미이다. 근대 이전은 귀신을 달래야만 화가 미치지 않는다고 인식했다. ‘여귀(厲鬼)’는 불쌍하면서도 무서운 존재였다. 여귀는 불행하고 억울한 죽음을 당했거나 제사를 지낼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죽어 전염병과 같은 해를 일으킨다고 여겨지는 귀신이다. 그들을 달래기 위해 제사를 지내는데 그 제사를 ‘여제’라고 불렀다. 1822년 제주도를 덮친 콜레라에 희생된 수많은 여귀 역시 여제의 대상이었다.
그렇다면 여제는 어디서 치렀을까. 여단(厲壇)을 만들어서 거기서 제를 올렸다. 여단은 대게 관아를 중심으로 북쪽에 마련됐다. 제주도에도 여단이 있었을까. 답을 하자면 제주에도 여단이 존재했다. 지금은 남아 있지 않지만 예전 여단은 제주성 북서쪽에 위치했다.
1702년 이형상 목사가 제작한 ≪탐라순력도≫에 여단의 흔적이 보인다. 제주읍성의 군사 조련 상황을 점검한 그림인 ‘제주조점(濟州操點)’을 보면 제주성 북서쪽이면서 병문천 바로 동쪽에 ‘여단’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현재 위치를 가늠해본다면 삼도119센터 인근이다. 조선 중앙정부는 여제에 쓸 축문제 제물을 마련해서 보내기도 했다. 1822년 당시의 기록을 보자. “지금 제주 목사의 장계를 보건대, 돌림병이 치성하여 조그만 섬에서 수천 명이 넘게 인명이 손실되었다고 하니, 놀랍고 참혹함을 금하지 못하겠다. 위유 어사(慰諭御史)를 파견하여 제주 목사와 함께 위안제를 지내고 생사에서 헤매는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아울러 민간의 고통도 살피고 오게 하라.” - ≪순조실록≫ 25권, 순조 22년 10월 19일 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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